오랜만에 조합원 여러분께 글을 드립니다.

저와 SBS 본부 집행부는 요즘 최대 현안으로 부각된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간담회를 통해 수많은 조합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조합원들의 공통된 목소리는 ‘이대로는 못살겠다’는 아우성에 가까웠습니다.

하루하루가 산업 재해 수준인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시달리다 깊은 병을 앓고 있는 조합원, 쫓기는 방송시간과 밀려드는 업무량을 감당하다 못해 ‘달려오는 차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는 조합원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생명을 갉아 먹으며 SBS를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위험스런 자화상입니다.

공포물 같은 우리 일터의 실상은 지난 해 하반기 방송통신위원회가 조사한 ‘지상파 방송산업 노동실태 조사’를 봐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최장의 노동시간, 최악의 심리적 탈진 수준 등 SBS는 이미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체제는 ‘노동시간 단축’과 ‘방송의 특례업종 제외’라는 외부의 충격이 아니더라도 창의를 기반으로 하는 콘텐츠 기업의 특성상 결코 지속될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낡은 모델입니다. 창사 이래  ‘소수정예’ 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채, 법적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시간외 근무 보상체계 아래 사원들을 무제한 노동의 지옥으로 내몰아야 유지 가능했던 경영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은 노동시간 특례업종 제외로 인해 이제 수명을 다 했습니다. 혁명적 변화가 불가피함을 노와 사 구분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시청자 신뢰를 얻고자 하는 책임감 속에 많은 현장 조합원들이 정말 이렇게 노동시간을 줄이면 차질없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지 걱정이 적지 않으실 겁니다. ‘원래 방송은 그렇게 만드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조합원들도 꽤 있으신 듯 합니다. 그러나 무제한 노동을 기본으로 하는 현재의 제작 관행은 불변의 DNA가 아닙니다. 느슨한 노동시간 제한이라는 제도적 한계 속에 탄생한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도가 바뀌면 사회 변화에 맞게 우리 일터도 바뀌는 게 당연한 수순입니다. 이미 선진국 방송은 물론 국내 영화산업 부문 등에서도 노동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계약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미 밝힌 것처럼 노동조합의 원칙은 확고합니다. ‘52시간 노동시간 단축 제도의 원칙적 적용’이 첫 번째입니다. 앞서 거론한 일부 제작 현장 조합원들의 우려를 침소봉대해 노동시간 단축의 대의를 훼손하고 낡은 경영 전략과 모델을 적당히 유지하려는 사측의 제안은 수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측은 이 참에 노동시간 단축에 기반한, 근본적인 혁신의 내용을 담은 지속가능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임금손실 최소화의 원칙입니다. 많은 현장 조합원들이 노동시간 단축으로 시간외 근무 시간이 줄면서 이에 따른 임금 손실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합원들의 우려를 해소하고 왜곡된 초과노동 보상 체계를 이 기회에 근원적으로 바로 잡자는 게 조합의 방침입니다. 이를 위해 법적 기준의 1/3 수준에도 못 미치는 기존 시간외수당 협약 폐기를 검토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노동시간 단축 시행의 틈을 노린 ‘공짜 노동’을 방지하는 일입니다. 지금도 일이 밀려들고 있는 상당수 현업 부서의 조합원들은 법으로 보장된 휴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쥐꼬리만한 휴가 중 근무수당과 대휴수당을 감수하며, 혹은 그마저도 포기하며 방송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는커녕 공짜 노동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간주근로시간제도나 재량근무제도 등을 대안이라며 거론하는 일부 사측 인사들의 언행이 현장에 혼란을 더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근본적 혁신 대신 ‘무늬만 노동시간 단축’인 어떤 협상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와 같은 3대 원칙에 근거한 혁신을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과 시간의 압박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저와 조합 집행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SBS와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노동시간 단축을 계기로 한 근본적 혁신에 동의한다면, 저와 조합 집행부는 여러 간담회 자리에서 이미 설명드린 것처럼 사측과 모든 것을 테이블 위에 놓고 협상할 용의가 있습니다.

단, 이런 노사협상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우선 조합원들의 일방적 희생과 양보를 바탕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창사이래 지금까지 자신의 건강과 여가를 희생해가며, 해마다 수백억 원씩 초과노동의 대가를 양보해 SBS를 지탱해 온 조합원들에게 추가로 양보를 요구하려면 사측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책을 제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보상책엔 혁신으로 얻어지는 성과를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고, 지속가능한 SBS의 최대수혜자가 사원들이 되도록 하는 방안이 담겨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위기에 빠진 방송 재원구조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지상파 방송사 노사간 공동 협약 추진에 사측이 전향적으로 나설 것을 엄중히 촉구합니다. 노동시간 단축 과정에 필요한 추가 비용과 제작비 조달은 심각한 경영위기를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 노사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에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안정적인 노동시간 단축제도의 정착과 공정방송 확립, 그리고 지상파 방송 진흥을 위한 방송사 노사간 소규모 산별 공동협약 체결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KBS와 MBC, EBS 등은 노사 모두가 이미 참여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SBS 사측만이 산별교섭에 대한 낡은 관념과 지나친 확대해석에 기반해 유일하게 참여 거부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SBS가 직면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에 대한 비대칭 규제 해소의 문제와 재원 확충을 위한 제도 개선 문제는 결코 SBS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상파 방송사의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더 큰 압력을 가하고 공동의 노력을 다할 때 작은 희망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끝까지 사측이 지상파 방송 노사 공동협약 추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노동조합은 노사합의를 통해 추진할 수밖에 없는 노동시간 단축 문제에 대한 협상 거부, 혹은 언론노조 중앙 직접 교섭 등을 포함해 특단의 대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노동조합이 이번 방송사 공동 협약 추진에 동의한 것은 지금 SBS가 직면한 현실을 넘어설 가장 유용한 테이블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사측이 지금이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노동조합의 노력에 화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하지만 회피한다고 어느 날 뚝딱 대안이 만들어 질 일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담대하게 변화의 길을 헤쳐 나갑시다. 함께 걸으면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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