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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설] 여긴 어디? 우린 누구?
  •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 승인 2018.07.1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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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육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중략)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중략)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중략)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중략)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중략) 15살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중략)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12시간으로, (중략) “

무려 48년 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살인적인 노동환경을 고발하며 스스로 불꽃이 된 전태일 열사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 앞으로 썼다는 편지 내용의 일부다. 전태일 열사가 고발한 비인간적 노동조건 1순위는 장시간 노동이다. 평균 연령 18세의 청계천 미싱공들이 감내해야 했던 1일 15~16시간, 주당 100시간에 육박하는 장시간 노동은 젊은이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일자리를 잃을까 급여가 깎일까 하는 걱정에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저항’은 커녕 ‘준법’의 요구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난 시점에 노동시간 단축을 놓고 사측과 지리한 협상을 이어가고 있는 노동조합 전임자들의 가슴 속엔 답답함과 착잡함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초장시간 노동에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포기한 채 프로그램 걱정으로 하루하루 자신을 태우고 있는 조합원들의 아우성엔 눈 앞이 아득해진다. 드라마와 예능, 교양 등 제작 현장 곳곳에서 감내하고 있는 일일 20여시간, 주당 100시간이 넘는 초장시간 노동은 반 세기 전 청년 전태일이 고발한 청계천 미싱공들 조차 겪어본 적 없는 살인적인 수준이다.

아마 전태일 열사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닌 사회의 부조리를 감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방송사에서 이따위 사람잡는 노동시간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시위라도 벌였을 상황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사측은 현장 제작의 책임을 떠안은 우리 조합원들 뒤에서, 마치 50여 년 전 청계천 섬유공장 사장님들이 작업반장을 통해 미싱공들을 끊임없이 내몰듯, 경쟁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 위법과 공짜노동을 전제로 한 재량근로만이 살 길이라는 주장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외쳐대고 있을 뿐이다.

처벌을 유예한다는 정부 방침에만 기대 불법적이고 반인권적 노동현장을 방치하고 있는 경영진의 모습은 근로기준법 무시하며 소녀 미싱공들의 고혈을 짜내던 50년 전 청계천 섬유공장 사장님들과 몹시도 닮아 있다. 앞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에 동의한다면서도, 뒤로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시도 또한 납품 기일을 이유로 초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며 노동조건 개선은 차일피일 미루던 50년 전 청계천 섬유공장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초장시간 노동 속에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마저 갈아 넣어야 유지할 수 있는 전근대적 경영전략이 촛불혁명 이후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반 세기 전 전태일 열사가 외쳤던 근로기준법 조차 준수하지 못해 쩔쩔매는 현실 앞에 시공간 지각력마저 희미해진다. 여기가 과연 대한민국의 책임 있는 지상파 방송사 SBS가 맞는가? 여기는 어디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jyta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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