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금기를 넘어선 투쟁의 발자취

이 악물고 버텨낸 20년. 성년이 됐습니다. 청춘을 걸었던 20년 전 조합원들은 어느새 흰 머리 중년이 됐습니다.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과거의 사진과 자료들을 훑어보며 눈시울이 더워지고,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청춘을 걸고 깃발을 세운 노동조합. 그리고 희생과 불이익을 온 몸으로 감수하며 버텨낸 우리들. 노동조합의 발자취, 우리들의 역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금기의 벽을 허무는 도전의 역사,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노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불온한 입사면접장의 질문을 넘어 SBS인이 된 후, 수 많은 이들이 무노조 경영에 도전하다 일생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자는 해고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옹성 같던 금기에 구멍을 내고 깃발을 들어 올렸습니다. 20년 전 조합 출범 선언문에 적힌 것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0.13 합의는 1천 조합원 20년 투쟁의 결정체

줄기차고 끈질긴 싸움, 때로는 물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깨지기도 했지만 우리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이뤄낸 성과가 바로 지난 해 10월 13일 임명동의제 시행과 SBS 구조개혁방안 논의를 담은 노-사-대주주 간의 역사적 합의입니다. 결국 역사적 10. 13 합의는 어느 날 갑자기 운 좋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 20년 조합원의 땀과 눈물이 서린 결정체인 것입니다.  

벽에 부딪힌 10.13 합의 이행…대주주는 대화 거부

그러나 저는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와 찬사 속에 탄생한 10.13 합의가 소리없이 사라져간 다른 여느 합의처럼 사문화될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 간 저와 노동조합은 지주회사 체제 이래 노사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고, 우리의 생존을 위태롭게 했던 SBS 착취구조를 완전히 정리하고 새로운 노사관계 아래 창업주와 대주주에 대한 신뢰를 재구축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논의는 진전없이 벽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지주회사 체제를 바로 잡는 것은 SBS에서 유출된 이익을 어떤 방법으로 환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SBS 중심의 기획-생산-유통의 완벽한 선순환 구조를 복원하는 문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SBS에서 이익을 유출해 갈 때는 온갖 편-탈법을 서슴지 않더니 이익 환수 과정에서는 법적, 현실적 한계를 방패로 이익 환수가 아닌 타 계열사가 SBS 콘텐츠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논의가 변질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측 실무자들의 어려움과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명백한 것은 이익환수와 그들의 동의 없이는 SBS 의사대로 돈을 쓰기 조차 쉽지 않은 방식의 투지유치는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라는 점입니다. 이마저도 SBS 중심의 구조개혁이 완결적으로 이뤄진다는 전제가 있으면 조합이 동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지주회사 체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시정하기 위한 구조개혁 논의는 단 한 발짝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정훈 경영진과 대주주는 1년이 넘도록 현상 유지 외에 책임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지난 주 대주주인 윤석민 전 이사회 의장에게 합리적 대안 마련을 위한 직접 대화를 거듭 제시했으나, 대주주는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대화 조차 거부하는 대주주의 입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기형적인 지주회사 체제 현상유지, 또는 시간끌기로 일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이행 의지 없는 눈속임이었던 것인가요?

대주주 대화 의사 없으면 중대결단 불가피

10.13 합의는 노와 사, 대주주 간의 3자 합의입니다. 특히 SBS 중심의 수직계열화 등의 방안을 협의해 정하기로 한 부속합의는 지주회사 체제의 구조적 특성상 대주주의 적극적인 협의 참여와 결단 없이는 답을 낼 수 없습니다. 지주회사 내 타 계열사에 대해 아무런 법적, 실질적 권한을 가지지 못한 SBS 경영진과 노동조합이 방안을 만들어 봐야 대주주가 어깃장을 놓으면 그 뿐입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논의가 그렇게 진행돼 왔으며, 여전히 대주주는 뒤에서 ‘노사가 알아서 협의하라’는 무성의한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3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축이 대화의사 조차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소모적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20년 투쟁의 결과물이 의미 없는 종이뭉치로 전락할 위기 앞에 다른 어떤 노사간 접촉과 대화 역시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일단 지난 주 금요일부터 모든 노사간 현안대화를 일단 중지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사측과 대주주가 오는 25일 오후 6시까지 책임있는 구조개혁 방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10. 13 합의 이행의 의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중대결단을 내리겠습니다.

조합이 중대결단을 내리려 하는 것은 그만큼 SBS가 처한 상황이 위중하기 때문입니다.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SBS의 존립 조차 위태로운 상황에서, 차일피일 구조개혁을 미룬 미봉책으로만 일관하다가는 게도, 구럭도 잃는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한 기형적 지배구조가 온존한 가운데 사측이 추진 중인 드라마 분사마저 이뤄질 경우, SBS는 핵심기능을 모두 잃고 단순한 지상파 채널 관리 역할만 남아 구성원들의 고용불안과 노동조건 악화가 불가피한 껍데기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노동조합은 드라마 분야 분사의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이는 SBS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 기획과 생산-유통-수익 기능이 하나의 선순환 구조로 우선 복원될 때만 용인할 수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다 함께!  또 한 걸음!

노동조합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저 한 줌의 이익이 아닙니다. 방송의 주인인 국민의 충복으로 우리의 역할을 다 하는 것. 그런 구조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아래서 구성원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SBS의 장기 생존을 위한 구조개혁이 필수적입니다. 조합의 방침과 대응 방안은 곧 대의원대회를 열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동조합의 힘이 세졌다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정의와 민주주의, 더 큰 연대를 위해 쓰여질 때만 의미를 갖습니다. 내부의 편협한 이해, 객관적 변화를 무시한 작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남용하면 순식간에 사그라들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그 힘을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구조의 위기를 완결적으로 해결하고 국민의 더 큰 신뢰와 연대 속에 더 강한 SBS를 만드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16-17대 노동조합은 ‘함께 걸으면 길이 됩니다.’라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1,100여 조합원이 함께 한 발자취가 의미있는 길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다 함께! 또 한 걸음!’ 새로운 20년을 위해 다시 길을 나섭시다.

                                                전국언론노동조합 SBS 본부장 윤창현

저작권자 © 전국언론노동조합 SBS 본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