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미래는 성역 너머에 있다.

세상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졌고 풍경은 달라졌다. 우리가 제왕이었던 밀림은 황무지가 됐으며, 장애물이 없던 우리 앞엔 길이 끊어진 절벽이 기다리고 있다. 맹렬히 우리를 위협하는 경쟁자들은 누가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현란하고 빠르게 우리를 절벽의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위기는 오래된 것이다. 종편 탄생의 길을 열며 스스로 방송시장을 황폐화시킨 무모한 전략의 오류와 미래 위기를 말하면서도 현재의 단물과 곶감 빼먹기에 정신줄을 놓다시피 했던 지난 10년의 경영 실패는 우리를 도무지 헤어나기 힘든 질곡에 가두고 말았다. 위기를 초래한 자들이 혁신을 들러리 세우고 다시 더 깊은 위기로 우리를 몰아넣는 인질극에 SBS 전체가 발목 잡혀 있다.

지상파 방송의 전성기를 넘어 위기가 일상화된 오늘까지 지난 30년 간 우리는 위기극복을 말하는온갖 화려한 슬로건들을 목격해 왔다. 처음엔 밑바닥부터 구성원을 쥐어짜다가 막판엔 핵심적 문제의식과 혁신의 아이디어가 거세된 맹탕 보고서로 면피에 급급했던 경영책임자들의 표리부동은 그 수 많았던 T/F의 공식이 돼 버렸다. 지난 2016년 전사적인 혁신을 위해 채택된 S-TF 개혁안 역시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회전문 인사로 구성원의 혁신 의지를 꺾어 버리면서 3개월만에 좌초하고 말았다. 앞으로는 혁신을 말하면서도 대주주는 SBS 사유화라는 구태를 버릴 생각이 없었고, 그에 부화뇌동한 경영진은 한 번도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인 적이 없다. 이제 사측이 말하는 ‘혁신’과 ‘미래’는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 소년의 외침처럼 구성원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 독백이 된 지 오래다.

SBS에서 일어난 변화 가운데 그나마 혁신같은 혁신은 지난 2017년에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낡은 체제에 메스를 들이대고 성역을 허물어 조직의 위기를 극복해 보자는 구성원들의 의지와 열정이 모인 RESET! SBS! 투쟁이 그것이다. SBS의 체력을 방전시켰던 수탈적 거래구조를 청산한 것도, 미래를 열어갈 안정적이고 유기적인 사업구조의 단초를 놓은 것도, 시청자 신뢰를 좀먹던 대주주의 방송개입과 경영전횡을 막아낸 것도 경영진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싸워 온 노동조합과 구성원들이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로 꾸며진 무지갯빛 청사진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발 뒤꿈치가 위태롭게 버티고 서 있는 지상파 몰락의 절벽을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에 대한 아주 실질적이며 구체적인 고백이다. 그리고 그 피할 수 없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울 것임과 그 고통을 함께 의지하며 견뎌내자고 구성원을 설득할 수 있는 신뢰다. 위기극복과 조직혁신의 가장 강력한 엔진이었던 노동조합을 배제하고 거꾸로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며 신뢰를 파괴하는 리더십 아래서는 결코 이 거대한 파도를 넘을 수 없음이 자명하다.

노동조합과 구성원이 주도해 SBS의 미래를 다시 그려내는 미래위원회의 활동이 본 궤도에 올랐다. 전 영역을 망라한 20여명의 위원들이 치열하고 가감없는 진단과 토론으로 SBS가 처한 현실과 가야 할 미래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낡은 체제와 구성원의 미래를 담보로 현 체제의 수명 연장만을 꾀하는 기득권을 철저히 해체해 갈 것이다. 대주주와 경영진, 우리 스스로의 관행, 체념과 관망으로 부동(不動)하는 조직문화 등 어떠한 성역도 인정하지 않고 폐부를 찌를 것이다.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렸던, 아니 알고도 피해갔던 그 성역 너머에 우리의 길이 있다.

미래는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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