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10.13의 추억, 그리고 TY홀딩스
10.13 이후의 궤적… 탐욕의 3년, 불신의 3년
"소유 경영 분리, 수익 구조 정상화. 이 약속을 받아 내기까지 27년이 걸렸다. 2017년 10월 13일이었다. SBS 역사에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시작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27년 공든 탑이 무너지기까지는 채 3년이 걸리지 않았다."
3년 새, 희망의 자리엔 탐욕과 불신이 꿰찼다. 지난해 3월 이사회 폭거는 그 신호탄이었으며, TY홀딩스 체제는 탐욕과 불신의 부산물이었다. 그렇게 10.13은 빛 바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안 그래도 위기를 맞고 있는 미디어 시장, 길을 잃고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은 오롯이 조합원의 몫이었다.
노보 306호는 10.13 3주년을 맞아 탐욕과 불신의 3년사(史), 그 궤적을 되짚는다. 우리는 2017년 10월 13일을 빛 바랜 추억으로 끝낼지, 아니면 다른 추억으로 재구성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과연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가.
2017년 10월 13일
10.13 합의
그 시작은 RESET! SBS!였다.
촛불 이후, 방송을 사유화 했던 대주주의 민낯이 줄줄이 공개되면서 SBS 내부에서 개혁의 바람이 일었다. 구성원의 양심 선언도 나왔다. 침몰하는 SBS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열망은 RESET! SBS! 운동으로 호명됐다. 대주주는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협상 결렬과 재개가 반복되는 지난한 줄타기는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그렇게 10.13 합의가 성취됐다. SBS 사장과 SBS A&T 사장, 보도와 편성, 시사교양 본부장에 대한 임명 동의제 시행을 약속 받았다. 사외이사 3인 가운데 회사와 노조가 1인을 추천하고, 나머지 1인은 회사 추천인 가운데 노조의 동의를 얻어 정하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신뢰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합의는 '신뢰의 위기'에 대한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한 걸로 끝나지 않았다. SBS 조합원들이 피땀 흘려 일한 수익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이른바 '구조의 위기'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었다. 수익 정상화를 위해 앞으로 노사가 머리 맞대고 방법을 찾기로 약속했고, 이를 합의문에도 담았다. 창사 이래 SBS를 옥좼던 신뢰의 위기, 구조의 위기를 매듭짓기 위한 밑그림이 그려졌다.
달리 말하면, 10.13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SBS의 미래를 위해 첫 발을 떼는 신호탄과 같았다. 진정한 의미의 RESET! SBS!가 시작됐다.
2019년 2월 20일
SBS 정상화 합의
10.13 이후, 노사는 때로는 양보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줄다리기를 했다. 52시간 시대, 경쟁사에 비해 비교적 높은 수준의 유연근로제 협상도 이뤄냈고, 임금 협상도 큰 갈등 없이 진행됐다. 노사는 건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머리를 맞댔다.
노조는 10.13 당시 사측이 약속했던 '수익 정상화'에 대한 협의를 계속 요구했다. SBS의 수익 유출을 막기 위해, SBS 중심으로 기획, 제작, 유통, 수익의 선순환 구조를 이뤄낼 '수직 계열화'가 그 목적이었다. 사측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협의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읽혔다. 당시 노조는 "사측이 구조개혁 방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중대 결단을 내리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2월,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협상이 타결됐다. 2.20 합의였다. 합의문은 "SBS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추진해 SBS 중심으로 한 콘텐츠 생산 유통 체계를 완비한다"고 썼다. 시가 1000억 원 대 자산도 환수됐다.
2.20 합의는 10.13 합의만큼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다. 노사가 10년 가까이 이어졌던 수익 유출과 콘텐츠 유통을 둘러싼 갈등을 끝내자는 의지를 재확인했기 때문이다. SBS의 대주주인 미디어홀딩스가 SBS 성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원칙을 명문화한 점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10.13이 수익구조 정상화의 입구였다면, 2.20은 출구와 같았다.
2019년 3월 28일
이사회 폭거
10.13과 2.20, 두 합의의 의미는 단순히 제도적 성과에 그치지 않았다. 그간 첨예했던 노사 갈등의 역사를 접고, SBS의 미래를 논의할 신뢰의 공론장(公論場)을 복구했다는 상서로운 함축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었으며, 언제든 토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만든 공론장은 파괴되고 말았다. 지난해 3월 28일 대주주의 이사회 장악 시도는 노골적이었다. 소유 경영 분리 원칙을 주장했던 인사를 무보직으로 좌천시키고, 인사와 재무, 전략을 대주주의 통제 하에 두려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사회 내부에서 노사합의 위반 지적이 나왔음에도 소 귀에 경읽기였다. 징후도 없이 급작스럽게 진행됐다.
한순간에 27년 공든 탑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사회가 열렸던 20층 목동 사옥은 비상 계단까지 봉쇄됐다. 사실상의 비밀 이사회였다. 제대로 저항 한 번 할 수 없었다. 노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일 뿐이었다.
탐욕은 그렇게 수면 위에 올라섰다. 10.13 합의가 무색하게 탐욕은 적나라 했고 노골적이었다. 신뢰는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2019년 5월 21일
검찰 고발
노조는 대주주의 자격을 지난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대주주와 경영진은 미래 먹거리로 불린 부천영상단지 공모에 꼴찌로 탈락해 무능을 입증하는 일도 있었다.
폭거에 분노한 조합원들 사이에서 제보가 이어졌다. 대주주의 한 참모가 SBS를 이용한 일감 몰아주기로 200억 원대 부당 이익을 거뒀다는 의혹, 또 다른 참모의 아들이 SBS 콘텐츠허브에 특혜 채용됐다는 의혹, 미디어홀딩스가 SBS 적자 상황에서도 '경영자문료' 수십억 원을 빼 갔다는 의혹, 대주주가 5% 지분을 갖고 있었던 '후니드'에 일감을 몰아줬다는 의혹 등이었다. 노조는 업무상 배임 혐의로 윤석민 회장과 박정훈 사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사실 이 과정에서 조합이 어디까지 가려고 하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조합 입장에서도 많은 고민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단순한 보복조치로 읽힐 것 역시 우려했다. 하지만, 이사회 폭거는 10.13 합의가 명시했던 소유와 경영 분리를 전면에서 부정하는 것이었고, 이는 대주주의 방송 사유화의 욕망이 되살아난 것과 다름 없었다. 위의 배임 행위들은 방송 사유화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모든 게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린 만큼, 자연히 노조 역시 대주주의 방송 사유화를 재교정하는 투쟁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2019년 11월 12일
미래委 혁신보고서 발표
대주주의 전횡에도 미래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투쟁은 투쟁대로, 혁신은 혁신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
SBS 미래 주체들이 중심이 된 노동조합 미래위원회가 10개의 세부 안을 회사에 공식 제안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시간을 허비하기엔 작금의 미디어 위기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실낱같은 기회의 문이 완전히 닫혀버릴 수 있다는 절박함 속에 모아진 아이디어들이었다.
미래위원회는 주니어 CP제도와 콘텐츠 스타트업 센터(CSC) 신설을 통해 유연한 프로젝트 중심의 조직으로 전환해야 함을 제안했다. 전체 프로그램의 30% 이상을 신규 프로그램으로 편성하고, 콘텐츠 투자를 공격적으로 확대할 것을 주문했다. 경영 투명성을 위해 사장도 감사 대상으로 만드는 방안, 윤리경영팀 독립과 상임 감사제도 부활 방안 등도 논의됐다.
노조는 임시대의원 대회를 통해 미래위원회 혁신 안을 사측이 수용하라고 결의했지만, 사측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미래는 다시 한 번 묵살당했다.
2020년 1월 22일
TY홀딩스 계획 발표
대주주는 날이 갈수록 방송의 미래보다 방송 사유화에 집착했다. 방송 사유화에 대한 욕망은 태영건설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TY홀딩스 체제'를 발표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TY홀딩스 체제는 그룹 전체에 대한 윤석민 회장 개인의 지배력을 극대화하려는 시도였다. TY홀딩스를 만들어 현물출자, 주식교환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치면 별 부담없이 윤석민 회장은 지분율을 높여 지배력은 강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 안정성이 훼손되는 건 불가피했다. TY홀딩스가 미디어홀딩스를, 미디어홀딩스가 SBS를, SBS가 SBS A&T와 스튜디오S를 지배하는 기형적 이중 지주회사 체제는 현행법상 불가능한 구조라 정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를 합병하고, 어디를 떼어내더라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기회비용은 오롯이 조합원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컸다. 조합원들의 임금과 생존권이 직접 위협받을 경우의 수도 있었다. 대주주와 경영진은 조합원의 생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특히, 미디어홀딩스 체제 해체 말고는 답이 없었다. 미디어홀딩스 체제는 2004년 재허가 파동 당시 노조의 도움으로 대주주가 기사회생하면서, 소유 경영 분리의 사회적 합의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SBS 미디어홀딩스를 통해 방송을 간접적으로 지배하자는 취지였다. TY홀딩스 체제는 25년 전의 노력마저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마치 10.13 합의가 무너진 것처럼.
2020년 9월 1일
TY홀딩스 출범
결국, TY홀딩스는 출범했다. 하지만 단서가 있었다. 지난 6월 방송통신위원회는 허가의 조건으로 "종사자 대표와 성실히 협의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노조는 그간 3번의 내용 증명을 보내며 윤석민 회장과 직접 협의하겠다고 밝혔지만, 윤 회장과의 직접 협의는 거부당했다. TY홀딩스 측은 "소유 경영 분리 원칙에 따라 윤석민 회장은 대화 상대가 아니다"고 답하더니, "방통위에 협의 내용을 제출하기 직전인 11월 말에야 자회사 대표이사들과 함께 만나겠다"고 했다.
노동조합은 지금도 방통위 이행각서에 서명한, 따라서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당사자와 함께 SBS의 미래를 논하자는 입장을 계속 전달하고 있다. 날 선 공방을 접어두고, 협의를 첫 제안하는 마음으로 함께 테이블에 앉자고 요청했지만, TY홀딩스 측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되레 '서면 협의'를 하겠다며 SNS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려 하거나, 서류를 등기로 붙이는 일도 있었다. 일방적 서면 협의의 증거를 남기려는 시도였다.
결국, 우리는 거리에 나섰다. 윤 회장이 나올 때까지 진행되는 릴레이 '끝장 집회'였다. 노사 간의 소통은 회의실 테이블이 아니라, 서울 여의도 태영빌딩 앞에서 이뤄져야 했던 2017년 10월 13일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소유 경영 분리, 수익 구조 정상화. 이 약속을 받아 내기까지 27년이 걸렸다. 2017년 10월 13일이었다. SBS 역사에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시작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27년 공든 탑이 무너지기까지는 채 3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