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 편지] “이제는 우리의 의지를 보일 차례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의지를 보일 차례입니다”
초유의 무단협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연휴 기간 SBS의 무단협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언론사에서는 2011년 이후 초유의 사태로 SBS 31년사에 불명예를 남긴 것은 물론이고 시민사회로부터 치욕을 자처하게 됐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단협을 막지 못해 구성원들께 걱정과 불안을 안겨드린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지난 1월 10.13 합의 파기에 이은 4월의 일방적 단협 해지 통고 그리고 일련의 협상 과정을 모두 지켜보셨을 겁니다. 무단협을 초래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사측의 퇴행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파국만은 막겠다는 절박함으로 여러 조합원의 반대에도 노조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한발 물러섰습니다. 숱한 방송 사유화와 보도 개입이라는 오욕의 역사를 끊어 내기 위해 구성원들이 피땀으로 쟁취한 임명동의제와 노조 추천 사외이사 제도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측은 노조의 이런 진정을 묵살하고 소유경영 분리와 방송 독립을 위해 노사 합의로 이뤄낸 제도들을 2008년 이전 수준으로 되돌렸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구성원의 다수가 반대하는 사장과 본부장 아래서 보도의 공정성과 제작의 자율성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SBS는 어떻습니까?
대주주와 경영진을 견제할 장치가 없어도 될 만큼 충분히 공정하고 건강합니까? 제작 현장에서 창의와 도전이 충분히 지지받고 있습니까? 지금의 SBS를 일군 우리의 피땀이 충분히 인정받고 존중되고 있습니까? SBS의 지난 30년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틈만 보이면 사익을 위해 방송을 동원한 대주주와 그런 대주주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한 경영진, 권력에 대한 감시에 의도적으로 눈 감고 자본의 이해에 충실했던 본부 책임자들이 우리의 소중한 일터와 미래를 얼음 아래 깊은 물속으로 처박아왔습니다. 그때마다 온몸을 던져 SBS를 물 밖으로 건져낸 것도, 또 깨지지 않도록 얼음의 두께를 두터이 해 온 것도, 또 한 발 한 발 조심히 내디딜 수 있도록 경계해온 것도 모두 우리였습니다. 다시 물속으로 처박힌다면 이제는 기회가 없을지 모릅니다.
이제는 우리의 의지를 보일 때입니다.
사측은 구성원의 반대와 시민사회의 우려에도 퇴행의 질주를 멈추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장의 불편과 귀찮음 때문에 싸움을 포기하고 2008년 이전으로 돌아갈 것인지, 우리의 미래를 SBS가 아닌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경영진의 손에 오롯이 맡길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그럴 수 없다면 우리의 존엄과 가치를 위한 싸움, 내 일터의 건강과 미래를 위한 싸움, 지상파 SBS가 공적 책임을 다해 시민사회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싸움을 시작할 것인지를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사측은 이제라도 퇴행을 멈춰야 합니다.
구성원 다수가 반대하는 경영진 임명을 강행하면서 SBS의 미래를 논할 수 없습니다. 종사자 대표인 노조를 겁박하고 흔들면서 노사 신뢰를 말할 자격은 더더욱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구성원의 목소리와 시민사회의 우려에 귀 기울여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노조가 내민 손을 맞잡는 것은 항복이나 굴욕이 아니라 우리의 일터와 미래를 위한 용기 있는 결단이자 화합을 위한 책임 있는 행동입니다.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존경하는 SBS본부 조합원 여러분, 제가 출마 때 이런 약속을 드렸습니다.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편하다고 가지 않겠습니다. 이미 난 길이라고 그대로 따라 걷지도 않겠습니다. 새 길을 찾으며 신발과 옷을 더럽히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고 조합원의 하나 된 힘을 믿고 흔들림 없이 걸어가겠습니다. 함께 걸어주십시오.
‘처음 그들이 왔을 때’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를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는
항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2021.10.5. 전국언론노조SBS본부 정형택 본부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