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 편지] 지금의 SBS는 10년 전 MBC와 다릅니까?
"지금의 SBS는 10년 전 MBC와 다릅니까?"
MBC 동료들이 2011년 무단협 이후 일터에서 벌어졌던 노동 탄압과 근로조건 후퇴, 부당 징계와 전보, 노조활동 방해 등의 아픈 경험을 공유해왔습니다(노보 5면 참고). 지금 SBS 상황이 암울했던 10년 전 파국의 시작이 아니길 바란다면서도 현 SBS 사측의 행태를 보면 그때와 많이 닮아있다며 걱정과 응원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무단협이 열흘을 넘어 장기화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럽고 걱정 많을 구성원들을 다독이기는커녕 사측은 어떤 협상안도 내놓지 않고, 협상에 의지도 보이지 않으면서 “새로운 단협을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임금협상 등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말로 이미 무단협으로 깊게 상처 입은 구성원들의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MBC 동료들의 염려가 현실화하는 것 아닌가 걱정입니다.
사측은 임명동의제 조항을 뺀 단협을 우선 체결하고 공정방송과 관련된 논의는 별도 TF를 만들어 협의하자며, 이것이 마치 새로운 협상안인 듯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난 4월 단협 해지 통고 이전부터 사측이 일관되게 노조에 요구해왔던 내용 그대로입니다. 임명동의제 조항을 단협에서 삭제하겠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단지 지난 4월과 달라진 게 있다면 말이 아닌 공문으로 TF구성을 제안했다는 점뿐입니다. 사측은 이게 마치 큰 변화이고 양보인 듯 한껏 포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한 쪽짜리 공문을 믿으라고 노조를 윽박지르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노사관계의 헌법과도 같은 단협마저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구시대적 퇴행을 벌이는 사측을 종이 한 장 받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TF는 어떤 결과도 담보하지 못합니다. ‘협의’를 좁은 의미로 해석해 형식적인 자리만 만드는 데 그칠 공산이 다분합니다. 이미 지난 6개월간 운영됐던 ‘SBS 미래발전협의체’에서 사측의 이런 행태는 적나라하게 확인된바 있습니다. 구체적인 투자액과 투자방법이 빠진, 노조의 동의도 얻지 못한 허울뿐인 투자안을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하면서도 사측은 노조와 협의한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측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측의 말만 믿고 임명동의제 먼저 없애도 괜찮겠습니까?
■ 기존 단협 우선 복원..추후 ‘임명동의제’ 성실 논의
오히려 임명동의제가 포함된 기존의 단협을 우선 복원하고 추후 임명동의제 관련 협의를 이어가자는 노조의 제안이 합리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이미 노조는 절박한 심정으로 사장을 임명동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양보안을 제시한바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 더 진정성 있다고 느끼십니까? 누가 더 단체협약을 하루 빨리 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노조는 이미 사측에 숱하게 양보했습니다. 지난해 6월 TY홀딩스 사전 승인 심사 때 노조는 소유경영 분리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는 시민사회의 우려에도 우리의 일터를 먼저 생각해 지배구조 변경에 동의했습니다. 지난 8월에는 실익과 명분, 대의 관점에서 항고가 당연하다는 많은 조언에도 구성원들이 바라는 ‘미래’로 향하기 위해 1, 2차 검찰 고발 건에 대한 항고를 포기하는 결정을 했습니다. 사측이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은 전임 위원장을 원색적으로 비난할 때도 노조는 감정을 절제하고 개인이 아닌 사측의 행위에 대해서만 지적했습니다.
무엇보다 SBS 31년사 초유의 무단협이라는 치욕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많은 구성원의 반대에도 노조는 임명동의제의 핵심인 사장을 대상에서 제외하며 또 한 번 양보했습니다. 결코 사측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제가, 노조가 지더라도 SBS 구성원이 이길 수 있다면, 우리 일터가 값비싼 갈등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물러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엉터리 단협’·‘악성 단협’ 체결 거부할 것
하지만 사측은 노조의 진정과 SBS 구성원의 바람을 저버렸습니다. 구성원의 반대와 사회적 지탄에도 무단협이라는 퇴행의 질주를 끝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게 시작일 수 있습니다. 무단협을 통해 노조가 무력화되면 임금협상을 포함한 모든 노사 협상에서 우리의 권리와 가치를 지키는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사측이 ‘대등한’ 노사관계 대신 ‘굴종적’ 관계로 재정립하려는 이유, “뒤틀렸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며 노조를 굴복시키려고 하는 진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MBC는 새로 단협을 쓰기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측의 갖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노동자의 권리와 공정방송의 가치, 자주적 조합 활동의 보장이 빠진 ‘엉터리 단협’, ‘악성 단협’ 체결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대신, 무단협을 초래해 일터의 갈등을 조장하고 구성원에게 불안과 좌절을 겪게 하며, 언론사가 노동을 탄압한다는 치욕을 자초한 것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물었습니다. 그래야 사측이 단협을 가벼이 여겨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또다시 단협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잘못을 반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SBS는 10년 전 MBC와 많이 다릅니까?
2020.10.14.
전국언론노조SBS본부 정형택 본부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