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목동로비. 당시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반대 노조 집회가 있었습니다. 노조원들이 꽤나 많이 모였습니다. 지상파 3사 파업 얘기가 있었고 우리도 부분파업 논의를 심각하게 거론할 때입니다. 심석태 위원장. 김종일 사무국장. 양만희 공방위원장 등이 집회를 이끌었습니다, 집회 도중 심 위원장이 갑자기 저를 호명했습니다. “멀리 탄현에서, 그것도 드라마에서 집회 참석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박수쳐 주세요.”

드라마 쪽은 사실 노조 집회 참석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서 참석한 제가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을 겁니다. 조용히 소리 소문 없이 묻어가고 싶었는데 얼떨결에 불려나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드라마에서 많이들 참석하려고 했는데 여차저차해서 못했다. 죄송하다. 오늘 분위기를 드라마 동료들에게 잘 전하겠다..” 횡설수설 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국장이 저를 불렀습니다. “너 어제 집회 갔었니?” “인사팀에서 얘기해 주더라. 참석한 거 가지고 뭐라 하려는 건 아니고 네가 지금 그럴 때냐? 드라마 준비나 잘해라” 등등. 아니, 노조 집회 참석한 게 잘못한 겁니까? 속에 울화가 치밀었으나 그 선배도 저를 위한다고 한 말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15년이 지나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 때 이후로 노조 집회, 민방한마당 행사 등을 참여하면서 잘 만날 수 없었던 다른 파트에 계신 분들도 알게 됐습니다. 노조 집회에서 만났던 분들은 제작 현장에서 만나거나 식당에서 만나면 유달리 반갑고 좋았습니다. 아마 묘한 동지의식이 발동해서일 겁니다.

95년 EBS에서 경력직 사원으로 채용되어 SBS 드라마 피디로 일하다가 스튜디오S로 분사되고 이제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지막지한 드라마 조연출 생활을 보내고 단막극으로 입봉할 때 세상의 모든 걸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캐스팅 때문에 속을 끓이고, 시청률에 일희일비 하며 지냈던 시간들. 촬영은 해야 하는데 배우는 오지 않고 섭외된 장소에서는 빨리 나가라 하고 담배 뻑뻑 피면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순간들이 생각납니다. 

사원에서 차대로 시간은 흘러 차장으로 부장. 부국장을 거쳐 노조위원장(지부장)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흐흐
 
뭘 이루었는지, 무슨 작품을 했는지, 유명했는지, 무슨 직급으로 퇴직했는지, 돈은 얼마나 벌었는지, 그 결과를 가지고 아마 저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하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결과로 저를 기억하겠지요. 하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저만이 알고 있습니다. 세간의 성공을 위해 남을 이용했는지 비겁하지는 않았는지 저만은 알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남들이 알아주는 그럴듯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해도 과정에서 부끄러운 행동은 안했다고 스스로 위안해 봅니다.

카톡 프로필에 “좌절하면 변절한다”는 문구를 넣어 놨습니다. 좀 더 좋은 세상은 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뜻에서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실망하고 비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자는 뜻에서입니다. 
저를 도와준 많은 선후배들에게 감사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은퇴 후에도 잘 살아보겠습니다.

2024.3.25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홍창욱 부본부장(스튜디오S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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