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경영상황이 지낸해의 어두웠던 터널을 조금씩 벗어나면서 정말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 일이 있었다. 회사에서 전 사원에게 노트북 컴퓨터 1대씩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한 것이다. 회사가 소유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개인 소유로 지급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단체 구입을 해서 가격이 낮아진다 하더라도 총 지급비용이 20억원대를 넘는 대규모 사업계획이었다 지난해 엄청난 임금 삭감과 인력감축, 분사 등을 겪었던 사원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노트북 컴퓨터를 업무에 이용한 적이 없는 부서의 사원들은 물론 노트북을 업무에 이용해 왔던 보도국 사원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었다.
소문내서 반응 좋지 않으면 만다?
그런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노트북 컴퓨터 지급 방안이 널리 알려지면서 예상 밖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급기야 회사측에서는 노트북 지급 방안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지급 방침을 퍼뜨린 것도 회사측이고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겠다는 것도 회사이니 별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사원들이 바보 취급을 받았아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현실적 문제 감안 못한 정보화 정책
노트북 지급과 관련해서 제기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회사측이 수십억원이 돈이 들어가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로인해 초래될 여러가지 파급효과에 대해서 제대로 검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노트북을 이용해 업무를 봐 왔던 사원들의 경우 제기되는 문제점은 상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노트북은 어떻게 할 것이며 소유권이 아예 사원에게 주어짐으로써 유지 관리상의 책임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도 제기됐다. 지금은 회사가 업무와 회사의 시스템에 맞춰서 유지, 보수는 물론 일정한 기간이 지나 기종이 낙후되면 이를 신형으로 계속 교체해 오고 있다. 그러나 개인에게 일단 지급을 한 뒤의 유지 보수등의 관리는 원칙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사원들의 우려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제작업무에 종사하는 사원들의 반응도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역시 휴대전화나 편집기를 더 지급하는 편이 업무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수백대의 노트북 컴퓨터가 수시로 회사의 전산시스템에 접속함으로써 제기될 문제점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현재도 접속이나 기사전송, 검색 등의 작업을 하는 경우 처리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 보도국 사원들의 불만인데 이처럼 수백대의 컴퓨터가 시스템에 접속할 경우 처리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은 뻔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반적인 전산팀의 업무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회사의 '순수한 의도'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회사측의 반응은 조금은 우려스런 것이었다. 특히 '회사의 순수한 의도'를 강조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회사의 의도가 아니라 그로 인한 영향이며 수십억원짜리 계획을 세우면서 이런 부분에 대한 상세한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원들에게 회사 로고가 새겨진 옷 한 벌 정도 지급하는 수준으로 안이하게 접근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회사측은 이런 선심성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현재 사원들의 장비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 지난번 노보에서도 지적했듯이 회사측은 아직 정작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휴대전화 조차 지급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노트북 지급을 추진한 것은 결국은 사원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회사가 큰 인심 한 번 쓰려는 전시성 사업이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방송의 질 높이는 장비 구입해야
그렇다고 노조에서 회사의 컴퓨터 지급 계획을 철회하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앞서 언급한 장비 문제와 노트북 지급 계획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먼저 휴다전화 지급이나 적정한 수준의 편집기 확보등 현재의 장비상의 문제점을 당장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사원 전체의 복지와 업무환경의 개선을 위해 노트북 지급을 차분하게 진행해 주기 바란다. 더구나 그동안 여러가지 문제점과 함께 노트북 지급 문제에 대한 각 부문별 의견차이가 충분히 드러난 만큼 회사측에서는 이런 문제점들을 보완할 수 있는 사려 깊은 계획을 세우기 바란다.
회사의 돈 가운데 회사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돈은 없다. 단 한푼이라도 엄밀하게 책임감을 갖고 계획을 세워 집행해야 한다는 '원론' 수준에도 못 미치는 충고를 마지막으로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