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1일, 허규 부장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해 이틀되는 밤 빈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술과 너털웃음의 상징이던 선배는 IMF의 찬 이슬과 함께 명예퇴직을 당하셨다. 개국부터 몸 담아온 회사에 대한 배신감이었을까? 이후 노선배는 좋아하던 술도 끊고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도 않은채 홀로 지내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암투병중이라는 소식이 들렸고 결국 50의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을 쓸쓸하게 마감하셨다.
병원에 마련된 조그마한 빈소에는 지난날 입가에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러나 이미 세상을 등져버린 노선배의 쓸쓸한 초상이 걸려있었고 그 옆에는 선배를 꼭 빼닮은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지만 인상만으로도 그 소년이 허부장의 외아들인 규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순간 내가 처음 입사했을때 허부장이 했던 말씀이 잠시 머리속을 스쳐갔다.
"정규진씨, 내 아들 이름이 규진이야, 허규진! 진짜 허규라는 뜻이로 규진이라고 지었어, 자네도 열심히 살아" 그저 "네"라는 짧은 대답을 했지만 이유없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취재부로 허부장은 제작부에 있는 관계로 일 이외에 많은 말을 나누지 못했고 그저 인사만 오갔을 뿐인데 왠지 모를 따뜻한 정을 허부장께 느끼곤 했다. 그날 빈소에서 나는 규진이를 보고 "네가 규진이구나. 진짜 허규......"라는 말밖에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기운내라는 뜻에서 축처진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빈소를 나오면서 진짜 허규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참으로 순수한 마음과 웃음을 잃지 않고서 힘든 세상을 거뜬히 헤쳐가리라는 나만의 생각을 했다 우리의 곁은 말없이 떠나간 허규 선배의 영혼이 다시 규진이의 몸속에서 진정한 허규 자신의 인생을 함께 꾸려갈 것만 같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