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선 전 청와대 법무 비서관이 사직동팀 보고서를 김태정 전 검찰총장에게 누출한 사건은 공직 기강헤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건이다. 김태정 씨와 박주선 씨의 검찰에서의 인연이 남다르다 할 지라도, 국가의 사정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친분으로 기밀 보고서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사건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개인적인 '친분'이라는 것이 얼마나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해외에서 유학생을 선발할때, 한국처럼 TOFLE이나 GRE점수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도 없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 교수들의 추천서가 중요한 선발기준이 되지만, 한국의 경우 모든 교수들은 거의 모두 '학업에 대한 열의가 남다르고 성실하며 장래가 촉망'된다고 한다. 추천을 의뢰받는 교수 입장에서는 괜히 나쁜 소리를 써서 그 학생과의 '친분'관계를 나쁘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외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을 뽑을 때는 수치화된 TOFLE이나 GRE점수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 '친분'관계에 휘둘리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는 '친분'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갖지 못했다. '친분'을 넘어선 공적인 관계의 형성은 사람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추천하는 제도가 몇 백년 가량 지속됨으로써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능력이 안되는 사람을 잘못 추천하면,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추천을 믿지 않아 추천자가 사회에서 매장되게 되고, 이런 과정이 누적되면서 공과 사를 구별하는 평가와 추천제도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예로부터 과거제도라는 전국적인 시험방식이 공식적인 인재등용방법으로 사용됐다. 기본적으로 성적순으로 사람이 등용되다 보니, 개인적인 평가나 추천에 의한 방식이 사용될 여지가 없었다. 혹시 개인적인 추천으로 등용되는 사람은 추천자와 어떤 식으로든 '친분'이 있게 마련이었고, 사람들은 시험만이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하게 됐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회사측이 EFG평가 제도를 시행하면서 상대평가를 강행하겠다는 데에 심히 우려하지 않을수 없다. 사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평가기준이 마련되지 않는 상황에서 상급자의 평가가 사원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평가자 자체가 피 평가자들과의 '친분'관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지 의문이며, 혹시 평가자가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평가를 실시했다 할 지라도 피평가자들이 과연 그런 결과를 공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시되는 상대평가제도는 무조건 상급자에게 '잘보이기 경쟁'을 이끌 확률이 높다. 날마다 평가자와 눈도장을 끼고, 부당한 명령이 있어도 평가를 의식해 '예, 예' 할수 밖에 없는 사내 분위기가 형성 될 것이다. 회사가 원하는 사내분위기가 이런 것일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분위기는 언론사로서의 SBS를 죽게 만드는 것이다.
회사측은 EFG 상대 평가가 사원들의 급여나 상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장기저긍로 연봉제로 가는 기초자료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말을 그대로 믿는 사원들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마치 연정희씨가 호피무니 반코트를 팔에 걸치기는 했으나, 입지는 않았다는 말고 ㅏ비슷하다. SBS는 명색이 사회현상의 본질을 궤뚫어보려고 하는 기자와 PD들이 일하는 곳이다. 우리를 바보취급하지 말라.
우리는 회사측이 사원들을 평가하겠다는 대원칙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평가는 사원들 대다수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된 위에서 신중히 시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상대평가 제도를 마련했다는 '업적'을 쌓기 위해, 사원들의 냉소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려는 '과잉충성파'에게 우리는 경고를 보낸다. 무리한 일처리는 사원들의 반발과 화를 부를 뿐이며, 회사의 발전에도 역행하는 길이다. 작성일:1999-12-10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