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닉네임
- SBS본부
시사다큐팀 김재원 조합원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내가 그다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복잡한 사회문제 보다는 최신 맛집 트랜드에 관심이 많고, 촛불시위 현장에 나갔을 때도 ‘사람들이 왜 모였는지’를 고민하기보다 ‘왜 이렇게 모여서 나를 힘들게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게 나의 솔직한 뇌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그것이 알고 싶다>를 맡게 되었을 때 친한 친구들이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내가 어쩌다보니 2년 넘게 <그것이 알고 싶다>를 연출하고 있다. 그런데 그 2년 사이 나에게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언제부턴가 ‘어쩔 수 없는’ 정의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어쩔 수 없는’ 정의감은 취재 도중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나도 모르게 분노를 느끼며 열정을 갖고 덤비게 만드는데 이번 ‘사모님의 이상한 외출’ 편은 정의감으로 보면 ‘역대급’이었던 건 분명했다.
처음 하지혜양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는 강원도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이 같이 모여 있으면 딸 생각이 너무 나 견딜 수가 없는 것이 떨어져 지내는 이유였다. 수차례 자살을 기도한 지혜양의 어머니는 우리가 지혜양의 방을 찍기 위해 집을 방문했을 때도 강아지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다. 그에 반해 살인교사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모님은 호화병실에서 손 떠는 연기 하나로 버티며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렵게 구한 수감일지와 당시 경찰 조서에는 서민을 하대하는 그녀의 이상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현실이 너무나 대조적인 현실을 보고 난 헐크가 되어갔다. 무엇보다 사모님이 나와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파고 싶어졌다.
이 프로그램을 취재하면서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질문은 단순했다.
‘어떻게 무기수가 교도소를 나와 호화병실과 자택에서 생활할 수 있는 걸까?’
옆집 아이를 붙잡고 물어봐도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것 같은 이 질문을 나는 2달에 걸쳐 파헤쳤다. 그리고 취재 끝에 찾아낸 질문의 대답은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돈에 의해 움직인다는 고전적인 이야기였다. 부자에게 친절한 주치의와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동창인 사모님의 변호사와 형 집행정지를 허가해 준 검사장... 아무도 딴지 걸지 않는 합법적인 커넥션이 사모님의 외출을 가능하게 만든 셈이다. 취재 기간 동안 ‘어쩔 수 없는’ 정의감은 나를 굉장히 용감하게 만들었다. 세브란스 병원의 주치의를 만났을 때 강하게 진료실을 박차고 들어가게 하였고, 형 집행정지 신청을 한 변호사에게도 수차례 찾아가 가는 차를 멈추고 따지게 만들었으며, 검찰도 압박해 사모님을 다시 교도소로 보내게 만들었다. 운도 따라서 회장님이 직접 우리 앞에 나타나시고 딱 한 번 가본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위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프로그램에 몰두했던 나는 방송이 끝난 지금 혹시 모를 미행을 신경 쓰고 조금 진지하게 가스총을 사야하나 고민하고 있다. 나라는 인간은 원래 그런 타입의 인간인데 적어도 지난 2달간은 무언가에 홀려 ‘어쩔 수 없이’ 행동했던 것 같다. 나에게 그런 감정을 심어준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내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이 사건이 보여준 현실에 ‘어쩔 수 없이’ 화가 나고 부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주변에서 나를 칭찬하는 전화가 많이 온다. 그런 말 들을 때 마다 부담을 느끼는 내 마음속에서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에요’란 말이 ‘어쩔 수 없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