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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기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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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본부
등록일
2013-07-17 17:23:27
조회수
1168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느 조합원의 ‘직무디자인’ 작성 분투기-

2013년 7월 어느 날...
여름 장마가 시원하게 내리던 날이었다. 오늘도 S사 평사원 모씨는 룰루랄라 출근을 했다. 여느 때처럼 선배, 동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는 선배들의 눈빛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 어디선가는 수런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파격적인 인사이동이라도 난건가?’ 데스크톱을 켜고 ERP를 가동. 앗, 오늘 새로운 공지 사항이 하나 떠있다. ‘직무디자인 작성 하세요’라는 제목이 달린 공지사항이다. 올 것이 왔구나... 까지는 아니고 번거로운 일이군 하는 생각부터 스친다.
어디보자. 직무목적, 과업수행, 전환가능 직무, 슬로건... 어라, 작년에는 본인의 직무를 스스로 디자인하고, 평가 기준도 본인 스스로 쓰는 방식이었는데? 올해는 뭔가 달라진 듯하다. 일단 3번. [과업과 주요활동]난이 생겼다. 그런데, PD직종인 모씨는 당황한다. 모씨의 업무는 프로그램 기획과 제작. 그렇다면 여기엔 제작의 A부터 Z까지 다 써야 하는 건가? 기획, 회의, 섭외, 촬영, 정산, 편집, 종편 등등? 일단은 구구절절이 옮겨다 쓴다. 그 다음부터가 복병이다. ‘성과지표’에 대한 항목이다. 내가 하고 있는 업무는 도대체 어떻게 성과지표를 매기지? 피디라면 누구나 목메는 시청률? 아니면 회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광고 판매율? 시청자들의 반응? 외부 상?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얼마나 만족했는지? 슬슬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동료들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곳곳에서는 “시청률 10%를 넘는다는 걸 목표로 한다.’고 써놓고 달성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목표치를 애초에 4,5%정도로 낮게 잡아버려야 되는 거 아냐?” 식의 얘기들이 우스갯소리처럼 오간다. 기자, 행정, 편성 등의 직군들도 참 난감하겠다 싶다. 평가를 어떻게 할까? 특종의 개수? 오차 없이 해낸 정산? 편성으로 인한 시청률 신장효과? 그게 과연 측정이 가능할까?
어쨌든 의도를 알 수 없는 5번 [의사소통 대상] 항목까지 어찌어찌 통과. 6번 [전환가능 직무]항목으로 넘어온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막힌다. 일단, 내가 하고 있는 직무의 해당항목 자체가 없다! 내가 속한 제작 본부 안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생활정보, 인포테인먼트, 시사다큐, 쇼, 코미디, 버라이어티밖에 없다니. 아니, 지금 방영되는 수십 가지 프로그램이 이 6가지 장르로 다 묶인단 말인가? 리얼리티 프로인 <짝> 피디는 뭐지? 야외 토크 <땡큐>는? 사회공헌프로 <희망TVSBS>는? 기획팀은? 팩츄얼 프로그램, 시트콤 등 장르 자체가 선택지에 아예 없는 프로를 준비하는 선배들이 아침에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제작 현장이나 포맷의 종류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
마지막 9,10번 항목은 ‘영혼 없는’ 글짓기를 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 급훈 정하듯 창의성, 협동심 등의 슬로건을 좋은 말로 포장해 입력시켰다. 이것들도 다 평가항목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평가할지 참 궁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오전 내내 사무실을 술렁이게 한 직무 설계서 작성이 끝났다. 그런데 풍문을 듣자하니, 이 직무 설계 때문에 각 부서 부장님들과 팀장들도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어느 부서는 작성한 직무 기획서를 다시 반려시켜 ‘다시 써’라고 했다하고, 어떤 부서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를 토론하기 위해 회의에 돌입했다한다. 결국 이날 SBS의 모든 사원은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은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느라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직무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설계서에 자신의 업무를 억지로 ‘구겨 넣느라’ 애먼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넌 대체 어떻게 썼어?’라는 얘기가 하루 종일 오간 걸 보면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 오후, 쏟아지는 장맛비를 창밖으로 바라보며 S사 회사원 모씨는 생각한다. 모두가 혼란스러웠던 이날, 누군가의 의도처럼 ‘비전실천’의 드높은 가치를 가슴에 새기며 ‘이번 분기도 열심히 일해 봐야지’라고 생각한 사람이 더 많았을까? 아니면 부장, 차장, 사원 가릴 것 없이 ‘대체 이 설계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평가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까?
작성일:2013-07-17 17:2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