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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SBS의 고질적인 경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비법이 있다. 아래의 명제들을 따라와 보시라.
명제 1. SBS는 콘텐츠 기업이다.
명제 2. 콘텐츠 기업이 살 길은 콘텐츠를 제대로 만들고 제대로 된 값에 파는 것이다.
위의 두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SBS 직원은 없을 것이다. 다음.
명제 3. 콘텐츠를 제대로 만들려면, 제작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최대한 존중되고, 제작 과정에서 유관 부서의 유기적인 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명제3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경쟁사들과의 콘텐츠 전쟁에서 지금은 좀 위축돼 있지만, 어쨌거나 이를 돌파하는
길은 창의성과 자율 그리고 협업 체계에 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명제4는 어떤가.
명제 4-1. 콘텐츠를 제 값에 팔려면, 방송 언론 기업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명제 4-2.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불편부당한 자세로 공정 방송을 실천하고 한국 사회의 의제를 제시하는 등 공익에 기여하여야 한다.
콘텐츠 제값 받기의 전제는 신뢰이다. 신뢰를 잃은 콘텐츠는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당연히 제 값을 받을 리도 없다. 명제4와 다른 방법론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조합은 열려 있다.
콘텐츠를 제 값 받고 팔려면 여기에 또 다른 명제 하나가 추가되어야 한다.
명제 5. 콘텐츠를 제 값에 팔려면, 유통이나 판매 등 일부 기능을 아웃 소싱하더라도, 생산자가 가격 결정권을 포함해 콘텐츠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소유해야 한다.
부가가치는 생산 자체가 아니라 유통과 판매에서 창출된다. 밭을 일궈 작물을
생산하는 이는 농부지만, 결국 이문을 남기는 것은 유통업자들이다.요새 그나마
돈 번다는 농부들은 직거래니 뭐니 해서 가격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이다.
물론 가격 경쟁력을 더 중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더 싸게 만들어야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충분히 고민해 볼 문제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선 순위일수는
없다.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은 컨베이어벨트에서 일률적으로 조립되는 것이 아니라
無에서 창조되는 문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만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제대로 만들면 그야말로 대박이 난다. 대박의 전제는 당연히 그 제품에 대한 배타적 권리이다.
위의 다섯 가지 명제를 놓고 이번 비상경영안을 들여다보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것들이 눈에 띈다.
먼저, 제대로 된 콘텐츠 만들기.
긴축경영안의 첫머리는 제작비 5% 삭감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 좀 방만해 보이는
제작비의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내고 개선하는 것이 경영이다.
그런데 일률적으로 5%를 삭감하라는 것은 태만한 경영이자 직무 유기이다.
콘텐츠 생산자인 우리는 일 할 맛이 나지 않는다. 콘텐츠가 SBS의 먹거리임을
인정한다면, 제작비 삭감은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할 최후의 수단이다.
긴축경영안 두 번째는 CP, 팀장들의 보직 수당과 업무 추진비를 반토막낸 것이다.
임원들도 직책 수당 절반을 반납했다고 한다. 일단 CP, 팀장의 경영 책임이 임원들과 같은 수준인가 하는 것은 치사하지만 차치하기로 한다.
CP, 팀장들은 ‘제대로 된 콘텐츠 만들기’의 지휘관이다. 전쟁으로 치면 최전방의
중대장이다. 그들이 제작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어떻게 보장하고 유관 부서와의
유기적 협업 체계를 어떻게 만들어주느냐에 따라 콘텐츠가 달라진다. 지휘관의
손발을 묶어 두고 어떻게 콘텐츠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없느니만 못한 지휘관도 있다는 거 안다. 하지만 그런 이를 찾아내 솎아내고 적임자를
배치하는 것이 곧 경영이 아닌가.
제작비 일괄 삭감으로 제작자의 창작 의욕을 꺾고, 그 제작자를 일으켜 세우고
격려해야 할 CP, 팀장들을 긴축경영의 총알받이로 내세워 어떻게 무슨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음, 콘텐츠 제 값에 팔기.
이건 이미 수년에 걸쳐 노동조합에서 문제 제기를 해 왔던 부분이다. 경영진도 더는 안 되겠던지 이미 체결된 계열사와의 콘텐츠 요율 협약을 파기하고 훨씬 상향된
안으로 재계약을 하겠다고 한다. 이제라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부디 사원들도
만족할 만한 수치이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왜 이렇게 요율 협상에 집착하는 걸까.
콘텐츠 요율이라 함은 SBS의 콘텐츠를 계열사가 알아서 팔고, 그 수익금을 몇 %로
서로 나누느냐 하는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건 아닌가. 우리가 만든 콘텐츠를 두고
왜 우리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우리 SBS는 한여름 땡볕에
죽어라 밭 갈고 피를 뽑았지만, 가을 되면 눈물을 머금고 중간 상인에게 농작물을
넘기는 농부 신세라는 말인가.
경영 위기를 타계할 정답은 나와 있다. 문제는 이 답을 누가 실천에 옮기는가
하는 것이다. 경영진은 노동조합이 제시한 이 비법 (사실 아주 평범한 방법) 을
실행할 수 있는가. 혹 우리 SBS 경영을 대표하시는 분들 모두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그 곳의 의중이 무엇인지 헤아리느라 좌고우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이 비법으로 최선을 다해 경영을 했는데도 지상파가 사양 추세라 불가항력이라면, 회사가 긴축경영안으로 제시한 몇 가지 뿐 아니라 임금이든, 인원이든,
우리는 무엇이든 내려놓고 고통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