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을 드립니다.
제가 1,100여명의 생존권과 미래를 책임지는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의 대표자로 책임을 맡은 지도 벌써 5년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저로서도 예상치 못한 인생항로의 전개였고, 사회적으로는 수십년에 한 번 벌어질까 말까 하는 역사의 격동을 고스란히 겪어낸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우리는 대주주와 경영진이 한 번도 제시하지 못한 SBS의 미래 비전을 직접 제시하고 꿋꿋하게 길을 개척해 왔습니다. 우리의 노력을 배신해 온 SBS의 구조적 한계를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을 지난 몇 년간 쉼없이 벌여 왔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 한국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임을 입증해야 미래를 열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7년의 RESET! SBS! 투쟁은 바로 그 출발이었습니다. 촛불 시민이 열어준 길을 통해 얻어낸 10.13 합의와 뒤이은 2.20 합의는 무기력이 지배하던 조직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희망과 비전이 화제가 됐고 SBS가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2019년 3월 이후… ‘존재하되 죽어있는 회사’ SBS
그러나 2019년 3월 윤석민 회장의 취임 이후, SBS 노사관계는 완전한 퇴행으로 점철돼 있고, 10.13 합의는 순차적으로 파기됐으며, SBS는 다시 침묵과 불신, 무관심과 체념이 지배하는 조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조합원 여러분,
윤 회장 취임 이후 지난 20개월 동안 여러분은 SBS의 미래에 대해 대주주로부터, 혹은 경영진으로부터 무슨 청사진을 보고 들으셨습니까? 제작비 줄이고, 취재비 삭감한 탓에 현장에서는 사무실 휴지 조차 자비로 충당하고 야근 컵라면 한 그릇도 마음 편히 먹지 못한 채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경쟁사보다 낫다는 단기실적은 사실 피땀이 흥건한 구성원들의 살을 베어낸 것입니다. 비전없는 비용축소로 일관하면 앞으로는 살이 아니라 뼈를, 나아가 우리의 일자리를 흑자의 대가로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혁신에 실패하고 시장에서 도태되는 기업들이 걷는 쇠퇴의 전형적인 경로를 SBS가 이미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석민 회장의 가장 큰 잘못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직의 혁신적 에너지와 창의적 열정이 윤석민 체제의 시작과 함께 밑둥까지 잘려 나갔습니다. 조직은 가라앉았고, 구성원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적자가 나더라도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내부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열정이 사라진 조직은 쇠락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경영 분석가인 엔도 이사오는 이런 조직을 “존재하되 죽어있는 회사”라고 정의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피땀을 쏟아부은 SBS가 급속히 “존재하되 죽어있는 회사”로 변해가고 있음을 다들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위험의 징후는 다른 여러 지표로 동시에 확인되고 있습니다. 공모가격 이하로 떨어진 주가에 노동조합 사무실에까지 주주들의 항의전화가 이어지고 있고, 몇몇 조사에서는 종편에 역전된 시청점유율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으며, 잠시 회복하던 시청자 신뢰는 무의미한 수준으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무비전의 단기흑자 말고는 모든 숫자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윤회장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할 상황입니다.
지난 30년, SBS를 동원하고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윤석민 TY 홀딩스 회장은 새로운 30년을 위한 어떠한 비전과 청사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TY 홀딩스 출범 과정에서 모든 리스크를 SBS 구성원들에게 전가하거나, 매각 가능성을 공시하기도 했습니다. 또 올들어 윤 회장을 만났다는 정관계 인사들의 입을 통해서는 ‘SBS를 팔고 싶어한다’, ‘지상파 면허를 반납하려 한다’는 등의 말들까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윤 회장과의 단독협의를 요구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대주주로서 SBS를 근근이 버티는 한계기업으로 방치하며 건설자본의 방패막이로나 써먹을 것인지, 아니면 강력한 신뢰에 기반한 최고의 콘텐츠 기업으로 키워나갈 비전과 계획이 있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매각하려는 것인지 등을 당사자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도 윤 회장이 SBS에 대한 뚜렷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노동조합은 지금까지 그러했듯 우리 일터 SBS와 조합원의 미래를 위해서 직접 비전을 제시하고 필요한 추가 행동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2020년의 선택이 30년을 좌우할 것입니다.
조합원 여러분,
태영건설의 사익 추구가 SBS를 망칠 때마다 조직을 지킨 것은 경영진이 아닌 노동조합이었으며, 지난 2004년 재허가 파동 과정에서 태영 측에 기사회생의 손길을 내민 것도 노동조합이었습니다. SBS를 지키고, 결과적으로 윤석민 회장이 10조원대에 육박하는 거대기업집단의 총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의 인내와 노력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입니다. SBS가 없는 TY홀딩스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해 윤석민 회장의 취임 이후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지난 2004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태영건설에 우리가 내민 선의의 손길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던 것인가 하는 근본적 회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년 수십조 원을 투자하며 콘텐츠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가는 거대 글로벌 자본의 공세를 구성원들의 피땀만으로 버텨내는 것은 지속불가능한 일입니다. 건설자본 지배 아래 ‘비전없는 현상유지’에 급급한 우리가 수많은 대체자들의 성장 속에 과연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가에 대해 이렇다 할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엄중한 상황입니다. SBS의 미래를 개척할 자구노력의 핵심은 대주주의 몫입니다. 윤 회장이 사회적 신뢰 구축과 기업의 성장과 혁신에 필요한 자본의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TY홀딩스 승인 조건의 이행 과정과 SBS 재허가 심사 과정을 통해 윤 회장이 과연 그러한 자구노력을 기울일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2020년의 선택은 결코 2004년 이후처럼 배신과 기만의 역사를 재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미래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담하게 선택하고 겪어야 할 것들은 담담하게 감당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