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측이 10.13 합의의 '원인 무효'를 주장하며 임명 동의제 폐지를 들고 나오자, SBS 구성원들은 앞다퉈 성명서를 발표하며 철회를 주장했다. 구성원들의 성명서는 사측에 대한 단순한 경고에 그치지 않았다. 사측 논리를 치밀하게 반박하는 내용이 담겼다. 임명 동의제 폐지 시도에 대한 SBS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정리했다.

 

#모순에_빠지다

"안타깝게도 사측은 임명 동의제가 가지고 있는 제도 자체의 문제점은 전혀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계속 '10.13 파기' 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사측 스스로 임명 동의제 시행을 '획기적 조치'라고 일컬었던 역사가, 이제 와서 달리 평가 받아야할 이유가 생겼는가." (SBS 6개 직능단체 공동성명)
 

그간 내뱉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임명 동의제를 신뢰한다며, 제도의 의미를 격하게 기려왔던 사측이었다. SBS 구성원들은 사측의 발언 이력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사측의 자기 모순을 곱씹었다.


임명 동의제가 탄생한 지난 2017년 10월 13일, 박정훈 사장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제도를 마련했다고 치켜세웠다. (기자협회 성명)

"SBS는 공적 책무 강화를 위해 편성위원회·시청자 위원회·본부장 중간평가제·임원 임명 동의제 등을 충실히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2017년 12월 26일, 지상파방송사업자 재허가를 의결한 방송통신위원회 속기록에 기록된 문장이다. SBS가 재허가를 받기 위해 공적 책무를 강화하는 핵심 방안으로 공식적으로 약속한 것이 임명 동의제였다. (보도본부 15기 성명)

"임명 동의제는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안으로서 국내 방송 역사에 없었던 획기적인 조치다." 임명 동의제의 의미를 되새긴 이 말,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기억하는가? 2017년 10월 13일, 사측이 보도자료를 통해 밝힌 말이다. (보도본부 17기 성명)

박정훈 사장은 2019년 7월 26일 "대주주로부터의 방송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임명 동의제를 도입하고 본부장 책임제를 시행했다"라고 설명하면서 "그 결과 거의 완벽한 공정방송 체제를 갖추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하지만 불과 1년 반 만에 경영진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놨다. (보도본부 24기 성명)

 

방송의 공적 책무 강화, 국내 방송 역사에 없었던 획기적인 조치, 완벽한 공정 방송 체제……. 사측 스스로 임명 동의제 앞에 붙인 수식어였다. SBS 임명 동의제 역사의 한 편에는 사측의 동의와 지지도 포함돼 있었다. 전파라는 공공재를 사용하는 지상파 방송, 이를 경영하는 경영진의 자기 모순은 언론인 답지 못했다. SBS 구성원들은 자연히 부끄러움을 말했다.


"자랑스레 임명 동의제 도입해 놓고 지금 이러는 것, 시청자와 취재원들 앞에서 부끄럽다. 왜 항상 부끄러움은 우리 몫인가. 경영진은 부끄럽지 않은가." (보도본부 19기 성명)
 

#절차에_매몰되다

사측은 노동조합이 먼저 임명 동의제가 명시된 10.13 합의를 파기했고, 원인 무효가 된 만큼 임명 동의제의 근거가 없어져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노동조합은 그 모든 책임이 사측에 있음을 강조했다. 더군다나 임명 동의제의 근거는 단체협약에 있는 만큼, 사측의 주장은 근거 없다는 일관된 입장이다. 하지만, SBS 구성원들은 이런 식의 절차 논쟁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절차의 결함을 말하기엔 언론 민주주의 대의(大義)의 문제가 워낙 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10.13을 파기했느냐, 즉, 누가 절차에 결함을 만들었는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차는 중요하다. 하지만, 대의(大義)의 문제가 워낙 중할 때, 우리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도덕적 판단을 우선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결코 절차 문제에 얽매여 공동체의 진보를 부정할 만큼 융통성 없고 완고한 제도가 아니다. (보도본부 14기 성명)

10.13 합의와 단협 개정과 관련해 경영본부와 노조 가운데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지 이 자리에서 따질 이유는 없다. 임명 동의제 폐지는 임명 동의제가 방송의 공정성 제고와 회사의 핵심적 가치 실현에 방해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경영본부는 지난 3년 간 임명 동의제를 거쳐 임명된 사장과 본부장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방송의 공적 책무, 공정성 그리고 SBS의 핵심적 가치 실현을 저해했는지 실명을 적시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기 바란다. (보도본부 15기 성명)
 

즉, 사측이 절차라는 '나무'만 보다가 정작 대의라는 '숲'을 보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지적이었다. 임명 동의제는 시청자에 대한 약속이다. SBS가 시청자 앞에서 임명 동의제를 통해 '공정'과 '독립'을 선언했다면, 함부로 파기를 논할 수 없다. 그 어느 때보다 공정함에 민감한 시대다. SBS 구성원들은 사측의 시도를 '위선'이라고 규정했다.


임명 동의제가 없었던 과거의 우리가 어땠는지 벌써 잊었는가. 이제 와 '법과 원칙'을 핑계 삼아 자가당착에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를 시청자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위선자로 만드는가. 왜 우리를 다시 뒷걸음치게 하는가. (보도본부 24기 성명)

SBS의 신뢰도와 공정성이 땅에 떨어진 사실을 벌써 잊었는가.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했는지 사측은 기억 못하지만, 우리는 온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측의 단체협약 무효 시도는 시민들에게 외면 받고 손가락질 받던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보도본부 16기 성명)

 

#빌미를_삼다

임명 동의제라는 제도에 결함이 생기지 않는 이상, 제도의 존폐를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측은 지금껏 절차 문제 외에 임명 동의제 제도 자체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못했다.


사측은 '10.13 합의 파기'를 그 근거로 대고 있지만, 이는 노사 간 정치적 쟁점일 뿐, 임명 동의제 그 자체의 목적을 부정할 논리가 될 수 없다. 임명 동의제에 결함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제도를 파기할 이유가 없다. 임명 동의제가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할 때, 약간의 손질을 할 수 있을 뿐이다. (6개 직능단체)
 

결국, 사측의 임명 동의제 파기 시도는 노동조합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SBS 구성원들의 판단이다.


임명 동의제는 무슨 싸움의 도구, 협잡의 수단으로 갖다 쓸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제 막 상처를 딛고 새로운 자신감에 달려 나가고자 하는 후배들 가슴에 자리한 자랑이자 정체성이다. (보도본부 21기 성명)

임명 동의제는 보도본부 구성원들이 과거의 보도 참사를 딛고 일어서게 해준 버팀목이다. 임명 동의제의 문제점은 전혀 지적하지 못하면서 합의 파기의 책임을 지워 폐지를 운운하는 건 노조를 공격하기 위한 비겁한 핑계로만 느껴질 뿐이다. (보도본부 18기 성명)

임명 동의제를 폐지하면 단순히 노사 갈등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방송 독립성과 공정성이란 사회적 다짐을 깨뜨렸다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지난 30년 간 SBS가 쌓아 올린 언론으로서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꼴이 된다. (보도본부 17.5기 성명)

 

#저의가_의심되다

자기 모순, 대의를 간과하는 자가당착, 노동조합 공격을 위한 빌미……. 노동조합은 사측이 이런 맥락을 모를 리 없다고 판단한다. 사측의 임명 동의제 파기 시도는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적나라하다. 뭔가 다른 의도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SBS 구성원들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이를 '저의'라고 표현했다.


결국, 남은 경우의 사측의 '판단 실수'이거나, 혹은 '다른 저의'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 지금이라도 실수를 인정한다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 하지만, 후자라면 우리는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보도본부 14기 성명서)

사측에 묻는다. 기습적으로 임명 동의제를 폐지하려는 저의는 무엇인가?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말뿐인 약속이었나? (보도본부 17기 성명서)

임명 동의제 시행으로 새롭게 썼다고 평가했던 역사가 이제 와서 달리 평가 받아야 될 이유가 생겼는가? 그게 아니라면 반드시 개악해야만 하는 치졸한 저의라도 있는가? (보도본부 18기 성명서)

 

현재 노사는 단체협약 개정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사측은 다양한 전략과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임명 동의제 대상을 조정하고 싶을 수도 있고, 지금의 복잡한 상황을 지렛대 삼아 다른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노동조합은 단체협약 파기 경우의 수까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다만, 어떤 경우의 수에도 노동조합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임명 동의제는 결코 협상의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SBS본부는 이 원칙을 못박고 단체협약 협상을 이어가겠다. 사측의 온당하지 못한 시도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중심 잡고 버티겠다. 물론 협상은 진정성 있게 접근하겠다. 대화와 토론, 설득을 통해 문제를 풀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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