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했던 단체협약 협상의 쟁점들

SBS 노사 간의 지난한 단체협약 협상은 지난 1월 18일 시작됐다. 법률상 단체협약 유효 기간은 2년으로, 당시 유효 기간을 한 달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사측은 노동조합에 '단체협약 개정 요구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건네며, 단체협약 14장에서 명시하고 있는 '임명동의제'를 모두 삭제하자고 요구했다.

협상은 사측이 단체협약 해지를 통보한 지난 4월 2일까지 11차례에 걸쳐 진행됐지만 성과는 없었다. 노동조합은 성실하게 협상에 임하며 설득했지만, 합당한 반론을 듣지 못한 채 단체협약 해지를 통고 받았다.

SBS 구성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협상 과정에서 나왔던 갑론을박을 정리했다. 최대한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적기 위해 애썼다. 누가 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지, 누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구성원들의 판단에 맡기려고 한다.

 

지난 1월, 사측이 단체협약에서 임명동의제 관련 조항을 삭제하자며 노동조합에 보낸 공문.
지난 1월, 사측이 단체협약에서 임명동의제 관련 조항을 삭제하자며 노동조합에 보낸 공문.

 

● '원인무효' 됐다 vs 대의가 핵심

사측의 첫 알림문에서 알 수 있듯, 임명동의제 폐기의 핵심 논거는 '원인 무효'였다. 임명동의제가 명시됐던 2017년 10.13 합의가 파기됐기 때문에, 현재의 단체협약에서 임명동의제를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주장의 전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현재의 단체협약은 2018년 합의된 것으로, 10.13 합의와 별개 협상임을 강조했다. 임명동의제의 출발점이 10.13 합의인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노동조합은 10.13 합의 파기에 대비해, 합의 9개월 뒤 별개의 협상 테이블을 만들어 별개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노동조합은 사측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음을 피력했다. 사측은 지난 1월 첫 번째 알림문에서 "(노동조합이) 10.13 파기에 대비해 임명동의제를 단체협약에 넣자고 제안했고, 회사가 이를 받아들였다"며 두 협상이 별개로 이뤄졌음을 인정했다.

비유하자면, 사측은 "위법한 방법으로 수집된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다"는 독수독과(毒樹毒果 : 독이 있는 나무의 열매도 독이 있다)의 법리와 유사한 논리 전개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노동조합은 임명동의제라는 '열매'가 10.13 합의라는 '나무'가 아니라, 이후 단체협약 협상이라는 '별개의 나무'에서 근거했다고 반박했다.

SBS 구성원들의 성명서 역시 비슷했다. 지난 1월, 6개 직능단체는 성명서에서 "사측은 10.13 합의 파기를 근거로 대고 있지만, 이는 노사 간의 정치적 쟁점일 뿐, 임명동의제 그 자체의 목적을 부정할 수 없다"면서 "임명동의제에 결함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제도를 파기할 이유가 없다. 임명동의제가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할 때, 약간의 손질을 할 수 있을 뿐이다"고 썼다. 즉, 절차의 결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임명동의제가 함축하는 대의(大義)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17년 SBS 노사 10.13 합의문.
2017년 SBS 노사 10.13 합의문.

 

● 임명동의제가 최선인가 vs 결함을 입증하라

사측은 '대의성'과 관련한 논리를 의식한 듯, 반박의 지점을 뒤늦게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임명동의제가 대의인가"라는 반박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당시, 사측의 정확한 질문은 "공정 방송을 위한 제도가 꼭 임명동의제여야 하는가"였다.

노동조합은 이 질문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임명동의제를 없애자며 제도의 폐지를 먼저 주장한 건 사측이다. 그렇다면 제도가 불필요하다는 걸 사측이 먼저 입증해야 한다. 왜 꼭 임명동의제야 하느냐며 노동조합에게 따져 묻는 건, 마치 피고인에게 무죄를 입증하라는 오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봤다.

노동조합은 사측이 임명동의제의 결함을 먼저 입증해야 한다고 맞섰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제도의 결함을 설명하라고 하면, 사측은 다시 절차 문제로 회귀해 '원인 무효'를 거론했다. 노동조합이 다시 '별개 협상'이란 논거와 함께, 다시 임명동의제의 대의성을 강조하면, 다시금 "왜 꼭 임명동의제야 하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논의는 돌고 돌았다.

 

● 대안을 가져오라 vs 사측이 제시하라

사측이 임명동의제 제도 자체에 결함을 주장하기 시작한 건 지난 3월 12일, 8차 협상에서다.

사측은 임명동의제가 분란의 불씨가 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임명동의제가 정치 선거로 전락해 상호 비방이 넘쳐났고, 능력보다는 인기에 의존하는 선거로 전락했다는 논리였다. 임명동의제 결과를 비공개로 하기로 합의했는데, 그간 노동조합이 결과를 암시하는 표현을 썼다는 점도 그 이유로 들었다. 사측의 이런 주장은 지난 4월 2일, 단체협약 해지 통고 당시 사내 알림문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측은 "임명동의제의 맹점이 그대로 노출됐다. 조직의 리더를 선택할 때 능력과 비전보다 인기투표식으로 검증하는 태생적 모순이 있다."면서 "노동조합과 일부 직원들은 임명동의 절차조차도 시중의 정치선거판처럼 몰아갔다."고 썼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사측이 말하는 임명동의제의 결함이 제도의 기회비용에 불과하다고 맞섰다. 제도에 결함이 생기면 어떻게 수정하고 보완할지 고민하는 게 우선이며, 이런 보완책에도 해결이 요원할 때 폐지를 거론하는 게 이치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임명동의제는 SBS 역사에서 단 두 차례 밖에 시행되지 않았다. 제도 시행 초반인 만큼, 수정과 보완이 먼저라는 것이다.

나아가 노동조합은 분란 없는 선거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선거 제도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선거의 기회비용에 비해 선거를 통해 얻는 공익이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사측은 임명동의제 말고도 공정 방송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다른 대안도 있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은 그 대안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사측은 노동조합이 그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조합은 "사측이 먼저 대안을 제시하는 게 옳다"고 했지만, 사측은 노동조합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단체협약 해지 통고 직후, 사측은 알림문을 통해 "노동조합이 대안 제시를 끝내 거부하면 법에 따라 단체협약은 종결될 수밖에 없다"고 썼다. 일반적으로 제도를 바꾸고 싶은 당사자가 여러 경우의 수를 상정하는 게 협상의 상식일 텐데, 사측은 대안 제시의 책임마저 노동조합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 공정 선거 조항 강화 vs 부족하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협상을 합리적으로 끌어가기 위해, 사측의 논리적 모순을 감수하기로 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보다 이성적으로 접근해 협의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대안을 먼저 제시할 책임이 없음에도, 노동조합은 지난 3월 19일 열린 9차 협상에서 사측이 말하고 있는 임명동의제의 문제점을 보완할 조항 신설을 제시했다. 임명동의제의 공정한 운영 조항이었다.

제 95조 (임명동의제의 공정한 운영)
① 조합은 회사의 임명동의 대상자 지정 결정을 존중한다.
② 후보공지 및 투표기간 중에는 임명동의제의 취지를 훼손하는 선거운동 및 그에 준하는 행위, 근거 없는 비방, 음해, 특정 직종을 대변하는 의견표시 등을 하지 않는다.
③ 조합은 임명동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란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회사가 지정한 후보자에 대한 직·간접적 의견을 게시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노보, 성명서, 논평 등을 모두 포함한다.
④ 노사는 전자투표 이후에 그 결과를 직·간접적으로 암시하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
⑤ ①~④항을 위반했을 경우, 임명동의제 개폐를 즉시 논의한다.

 

노동조합이 제안한 신설 조항은, 사측이 말하는 정치적 분란이나 비밀유지 의무 위반 가능성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였다. 사측의 임명동의자 후보자 지정에 대한 인사권을 존중하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의견 게시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를 지키지 않을 때 임명동의제 개폐를 즉시 논의하자는 조항까지 넣어 논의를 이어가고자하는 취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는 기존 단체협약과 크게 달라질 게 없다며 노동조합의 제안을 거부했다. 사측이 원하는 대안은 결국, '임명동의제 폐지' 외는 없다는 의미로 읽혔다. 노사 간의 쟁점은 더 좁혀질 수 없었다.

 

노동조합의 판단으로, 협상 과정 속 노동조합의 주장과 반박은 이성적이었고, 합리적이었다. 협의에도 성실히 임했다. 노동조합은 2차 협상에서 "임명동의제 관련 논의는 서로의 간극이 크니, 논의 가능한 부분부터 차근차근 접근하자"며 이른바 '투트렉 협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협상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취지였다. 심지어 사측은 "노동조합의 제안이 옳다"고 동의하기까지 했지만, 불과 6시간 뒤, 사측은 첫번째 알림문을 올리며 여론전에 나섰다. 노사가 뒤바뀐 것 같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이미 한쪽이 결론을 정해놓은 상황, 상호 합리적 토론은 불가능할 것이다. 리더십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도, 최대한 대화와 토론으로 현안을 해결하고 싶었던 노동조합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노사 협의의 공간은 외나무 다리로 내몰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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