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 합의 파기로 삭제? 임명동의제의 존재 가치는 그대로
| 사측 주장: “노조의 대주주 고발로 10.13 합의는 파기된 것.. 합의에 근거한 단체협약의 임명동의제 조항도 당연히 삭제" |
사측이 밝힌 또 다른 단협 해지 이유다. 노조의 고발로 10.13합의가 파기됐기 때문에 단협에서 임명동의제 조항을 빼겠다는 논리다. 노조는 2017년 이뤄진 ‘10.13 합의’의 불가역적 존치를 위해 사측과의 별도 협상을 거쳐 2018년 8월 단체협약 14장에 임명동의제를 신설했다. SBS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제고하고, 시민사회와의 약속을 확실히 담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제도의 가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자, 헌법과 노동 관계법을 제외하고 최우선 규범인 ‘단체협약’에 추가한 것이다. 말 그대로 별개로 이뤄진 합의의 결과물이다.
사측은 노조의 고발 행위를 10.13 합의 파기 사유로 거론하고 있지만, 해당 합의와 어긋나게 대주주 마음대로 SBS 자회사(SBS콘텐츠허브) 이사진을 채운 행위(2019년 3월/노보 283·284호 참고)가 더 먼저였다. 해당 합의엔 임명동의제 외에 수익구조 정상화 방안도 포함돼 있다.
특히 사측이 문제 삼은 노조의 고발 행위 시점은 2019년 4월~11월이다. 사측이 돌연 고발 행위를 이유로 삼으며 10.13 합의 파기에 이어 단체협약까지 해지 통고한 건 약 2년이 지난 올해 초이다. 진정 고발을 합의 파기 원인으로 봤다면, 그 즉시 문제 삼았지 2년을 기다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 2년 사이에는 ‘지난해 6월 TY홀딩스 사전 승인’과 ‘지난해 12월 재허가’ 두 건의 심사가 있었다.
10.13 합의를 누가 파기했는가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임명동의제를 도입한 취지다. 노사가 이 제도를 도입하고, 나아가 별도의 단체협약에까지 명시한 이유는 노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다. 임명동의제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그대로인 이상, 제도의 존폐를 논할 수 없는 것도 명백하다.
■선의만 믿고 공정방송 실현 가능할까..제도가 필요한 이유
| 사측 주장: “임명동의제는 경영권 인사권 위축시키는 제도..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제도로 공정방송 충분하고, 대주주가 공정방송을 저해할 우려 없다“ |
사측이 내세운 또 다른 임명동의제 폐지 이유다. 그 어느 때보다 대주주나 경영진의 개입 없이 공정방송이 지켜지고 있지 때문에 임명동의제 필요성이 소실됐다는 논리다. 사측은 벌써 잊었겠지만, SBS 구성원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주주 선의에 의존한 말 뿐인 소유경영 분리 선언의 허상을 뼈저리게 겪어 알고 있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사안이다.
허무한 말로 공정방송을 실현할 수 없다는 건 SBS 역사가 방증한다. 경영진에 의해 보도가 좌우됐던 부끄러운 사실은 구성원의 기억과 노보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젊음을 바쳐 SBS에서 일한 뒤 명예롭게 떠났거나, 지금도 SBS를 지탱하고 있는 선후배 동료들이 창사 이후 지속적으로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제도 마련에 매진한 이유였다.
사측 주장대로 임명동의제 외에도 SBS엔 각종 장치가 있다. SBS보도준칙과 방송편성 규약에 따른 각종 편성위원회, 상향평가제, 본부장 중간평가제 등이다. 제도의 큰 뼈대는 창사 이후를 시작으로 2002년을 거쳐 2007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보도 참사와 제작 자율성 침해가 숱하게 이어졌고, 소유경영 분리 선언도 반복됐다. 더는 허무한 말잔치로 시청자와 구성원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는 공감대가 커지면서 2017년 임명동의제가 도입된 것이다.
사측은 “최근에 방송개입이나 공정성 시비가 확인된 것이 있느냐”고 말하지만, 2017년 임명동의제 도입의 결정적 원인이었던 대주주의 보도 지침과 방송 사유화도 몇 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드러났다. 그리고 사측 주장대로 ‘2017년 이후엔 대주주의 방송 개입도 없고, 공정방송이 지켜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17년 도입된 임명동의제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작동하는 제도를 없애려는 이유를 구성원들은 사측에 되묻고 있다.
■“언론인, 방송인으로서 최소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것일 뿐...
구성원 요구는 무리한 것도, 진일보한 것도 아니다.”
지난 1월부터 최근까지 진행된 노사협상은 SBS 역사에서도, 다른 사업장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형태로 진행됐다. 대부분 진일보한 제도와 환경을 만들고자 숙의하고 협상하지만, SBS는 정반대였다.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4년 전 치열한 논의 끝에 도입한 제도를 다시 논의하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논의가 아닌 해지였.
사측 주장대로 제도는 존폐를 거듭할 수도, 변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악법’이나 ‘비현실적 제도’에 한해서다. 게다가 공정을 지키며 담보하는 제도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촘촘해지고 정교해져왔다. 현재 SBS는 어떠한가. 사측은 SBS 31년 역사의 산물인 단체협약을 해지해 무단협 상황으로 만들면서까지 임명동의제를 없애야할 악법으로 보는 것인가.
구성원들이 요구하는 건 임명동의제보다 진일보한 제도가 아니다. 현 제도를 유지하려는 것일 뿐, 무리한 것도 진전된 제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사측이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SBS에 열정을 바친 선후배 동료와 언론인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수행하려는 구성원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