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 편지] 질 수 없는 싸움입니다. 져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SBS의 지난 31년을 돌이켜보면 공공재인 지상파를 사적 이익을 위해 떡 주무르듯 해온 대주주도 문제였지만, 회사와 구성원을 위해 대주주의 전횡을 막아내지 못한, 아니 막아내기는커녕 대주주의 이익에 앞장서 복무해왔던 사장과 경영진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아닌 대주주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장이 임명되지 못하도록, 또 반대로 대주주의 압력과 외부의 부당한 개입이 있을 때 독립경영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는 방패막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게 바로 ‘임명동의제’입니다.
사측은 이 중요한 제도를 구성원과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오직 대주주만을 바라보며 무조건 없애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노조는 사장을 임명동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양보안을 제시했습니다. 무단협이 되는 초유의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구성원을 불안하게 하고, 우리 일터의 갈등을 높이고,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야 할 언론사가 노동 탄압에 앞장선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 어떻게든 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측은 이마저도 거절했습니다. 시사교양, 편성, 보도본부장 등 공정방송 최고책임자까지 임명동의 대상에서 제외하라고 노조를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사장도 빼줬는데, 본부장까지 다 빼라는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사장, 본부장 다 빼줘도 SBS에서 보도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지켜질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는 어느 언론사도 대놓고 ‘막장’ 인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구성원과 시민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딘’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힙니다. 대주주와 사장에 순종적인 사람, 권력에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세울 의지와 능력이 없는 사람, 노동의 가치보단 자본 권력에 충실할 사람을 경영진으로 선택합니다. 우리 일터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적의 60%(보도본부 50%)가 반대하는 사람은 본부장으로 임명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사측은 지금 이걸 없애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노조의 양보로 사장이 임명동의 대상에서 빠진 만큼 본부장에 대한 임명동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제는 사장이 구성원의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임명동의 없이 새롭게 선임될 사장이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또는 권력에 굴종하는 결정을 할 때 구성원 최소한의 신뢰를 받는 본부장들마저 없다면 이런 횡포를 누가 견제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후에 우리가 그런 결정들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빼앗긴 동료의 권리와 사라진 내 소중한 가치를 되돌리는 일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는 사회적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사’입니다. 이번에 다시 시청자와 시민사회가 SBS에 등 돌린다면, 어쩌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세월호 보도 참사, 국정농단 보도 참사 때 SBS에 대한 싸늘했던 시선, 벌써 잊으셨습니까?
SBS가 공정방송과 노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나 자신과 우리의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임명동의제를 지키는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질 수 없는 싸움입니다. 져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2021.10.18. 전국언론노조SBS본부
정형택 본부장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