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 편지] 23년 전 그때처럼 노조 깃발 아래 모입시다

10월 26일 오늘은 23년 전 SBS에 노동조합 깃발이 처음으로 나부낀 날입니다. 소중한 동료가 대주주와 경영진이 휘두른 칼에 힘없이 잘려 나가는 걸 막기 위해 마음속 두려움을 몰아내고 그렇게 하나둘 노조 깃발 아래 모였습니다.

반노동적 기업 태영건설의 자회사에서 창사 8년 만에 노동조합의 싹이 튼 겁니다. 더는 양심을 속일 수 없다는 절박함에, 소중한 내 동료를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에, 다음에 쓸려나가는 건 나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 우리는 뭉쳤습니다. 

사측은 갖은 협박과 회유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걸 막으려 했지만 불과 닷새 만에 과반이 조합에 가입하는 단결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해냈습니다. 그렇게 용기로 싹 틔우고 의지로 키워온 노조라는 나무가 SBS에 굵게 뿌리내렸습니다.

대주주가 사익을 위해 공정방송과 노동의 가치를 훼손할 때, 권력과 자본이 SBS를 손에 쥐고 흔들려 할 때마다 노조가 앞장서 우리의 가치와 우리의 일터를 지켜냈습니다. 대주주와 경영진이 자초한 신뢰 상실로 SBS가 에스비에스가 아닌 멸칭으로 불릴 때, 동료 언론인들로부터 너희는 언론이 아니라는 치욕적인 수모를 당할 때도 우리는 노조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우리 일터를 바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대주주와 경영진은 23년 전 낡은 사고에서 단 한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주주의 사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방송독립은 내팽개쳐지고, 노동자의 권리는 무참히 짓밟힙니다. 지금의 무단협 상황 역시, 대주주의 일그러진 탐욕과 경영진의 무책임이 불러왔습니다. 

대주주와 경영진에게 묻습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 사회적으로 본이 돼야 할 언론사에서 노동탄압이 자행된다는 비난이 연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누가 SBS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까? 누가 SBS 구성원의 자긍심에 상처를 내고 있습니까? ‘건강한 콘텐츠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라는 사훈을 누가 어기고 있습니까? 대주주와 경영진이 생각하는 ‘더 나은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입니까?

사측은 언론 노동자의 근로조건인 공정방송 파괴를 위해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권리, 구성원과의 약속은 언제든 휴지장처럼 구겨질 수 있다는 걸 똑똑히 보여줬습니다. 한 번 그랬는데 두 번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측은 퇴행을 멈추기는커녕 노조를 무력화하고 구성원을 길들이는 폭력적 행태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혼란을 틈타 구성원 최소한의 동의 없이 차기 사장과 공정방송 최고 책임자를 임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무단협으로 이미 우리의 가치와 권리는 훼손됐습니다. 

이제는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분노를 드러내야 합니다. 행동만이 바꿀 수 있습니다. 더 인내하다가는 더 많은 걸 잃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늦을지 모릅니다. 행동만이 지킬 수 있습니다. 행동의 힘은 함께할 때 더 커집니다. 제가 맨 앞에 서겠습니다.

노조를 만든 것도 또 노조를 지켜온 것도 여러분입니다. 두렵다고, 당장 내 일 아니라고 피하고 관심 두지 않는다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무단협 상황에서도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싸움도 할 수 없습니다. 싸울 줄 모르는 우리에게 남는 건 굴종뿐입니다. 23년 전 그때처럼 사측의 칼이 언제 내 동료를, 나를 향할지 그저 두려움에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23번째 노조 창립일을 무단협 속에서 맞게 해 구성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노조 초유의 위기와 코로나 상황 등을 고려해 별도의 창립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노동조합이 준비한 조촐한 점심 생일상으로 함께 마음을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신 전국언론노조와 언론자유를 위해 함께하는 현직 언론인들이 우리 일터에 모여, SBS 무단협 사태를 무겁게 논의할 예정입니다.

존경하는 SBS 구성원 여러분, 우리의 존엄과 가치, 미래를 위한 싸움에 함께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단결해야 앞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습니다. 그게 23년 전 우리일터에서 노조 깃발이 내걸린 이유입니다. 고맙습니다. 

2021.10.26
전국언론노조SBS본부 정형택 본부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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