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회사 넘어 좋은 언론사 되려면 노사 신의성실 회복해야”
노조위원장 하겠다니 ‘이혼하자는 거냐’며 반문한 아내
3차 공고까지 냈지만,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입후보한 조합원은 없었다. SBS노조위원장(05~07년)에 이어 전국언론노조 위원장(07~11년)까지 지낸 최상재 전 위원장은 긴 한숨을 쉬며 “그러면 나라도 희생 하겠다”는 말과 함께 지원서를 냈다. 소식을 들은 이윤민 전 노조위원장(10~12년)은 노동조합 사무실을 곧장 찾아 최상재 후보자의 지원서를 찢어버렸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채수현 조합원은 고심 끝에 노조위원장(전국언론노조 SBS본부장) 지원서를 써냈다. 채 조합원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렸다. 아내는 “그러면 이혼을 하자는 거예요?”라고 반문했다. 미디어법 반대 투쟁으로 MBC와 YTN 노조 집행부 인사들이 줄줄이 해고당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14년 첫 기술직군 출신 위원장
소프트웨어연구원 출신으로 기술직군 최초 SBS노조위원장(14대/14~16년)을 지낸 채수현 조합원이 노동조합 일을 접한 건 단순 우연이었다. 2004년 당시 노동조합 간사가 열의를 가지고 일하는 채 조합원 모습을 보고 대의원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맡은 노조 정책국장 일은 재허가 파동과 맞물려 채 조합원을 <SBS 내부 개혁> 최전선으로 떠밀었다. 당시 노사동수 편성위원회 설치 등 <14대 개혁과제>를 만들기 위해 밤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96년 SBS 입사…직접 만든 오디오 시스템이 국내 표준
채수현 조합원은 1996년 입사해 SBS 파워FM 개국에 동참하고, 2004년 목동 신사옥에 라디오 등 스튜디오 이전을 준비하는 핵심 멤버였다. 라디오에 틀 오디오를 거대한 테이프로 녹음하던 시절을 끝내고 디지털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에 매진하기도 했으며, 음반자료실에 있던 LP나 CD를 전부 디지털화 했다. 지금은 150만 곡 이상 들어있는 ‘뮤직뱅크’ 프로그램 이름을 직접 지었다. 채 조합원이 참여해 만든 <SBS 오디오 파일시스템>은 국내 방송사의 표준이 되기도 했다. 채 조합원은 이걸 가장 뿌듯한 일로 꼽았다.
3년 늦춘 임금피크제 합의
이렇게 기술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SBS를 더 근무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 더 좋은 언론사로 만드는 열정은 가득을 넘어 넘쳐흘렀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전국언론노조 정책실장 파견도 마다하지 않았고, 라디오기술팀 소속으로 ‘뮤직뱅크’를 관리하던 업무마저 내려놓고 14대 노조위원장에 나서기도 했다.
노조위원장 임기가 시작된 2014년은 시작부터 다사다난한 해였다. 전임 남상석 위원장(13대/12~14년)이 실시 합의한 <임금피크제>를 어떡해서든 매조져야했다. 만55세부터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려는 회사에 맞서 ‘협상파기’라는 배수진을 치며 만58세 시행에 합의했다. 당시 방송사에서는 최고의 임금피크 조건이었다.
<콘텐츠판매 협상> 최고 성과…성과급 밑거름
채 조합원은 노조위원장으로서 최고 성과로 2014년 말 타결된 <콘텐츠판매 협상>을 꼽았다. 2008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되며 SBS콘텐츠 판매 권리는 지주회사의 자회사인 유통회사들에 집중됐다. 10년도 안 돼 유통회사들은 흑자인데, 콘텐츠를 제작하는 SBS는 적자가 됐다. 몇 년간 줄기차게 노동조합이 요구한 끝에 채수현호에서 협상 열매를 맺게 됐다. SBS가 받는 콘텐츠 요율을 올리고, 직접 판매하는 콘텐츠도 늘렸다. 채 조합원은 “이 협상을 하지 않았으면, 그간의 성과급은 못 받았을 것”이라고 소회했다.
노사, 신의성실 무너져…수년간 ‘윤창현 입장문’ 왜 게시?
채 조합원은 최근 “노사 간 신의성실이 무너졌다”고 우려했다. 사측과 협상을 하다보면 서로 밀고 밀리는 단계를 알고, 어느 특정 선을 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노동조합이 성명서를 내면 사사건건 사측이 경영위원회 이름으로 토를 다는 것을 꼽았다. 원래는 노동조합에서 성명서를 쓰면, 사측은 공개 반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사협력팀 등을 통해 협상을 했다. 또한 몇 년 째 WISE에 “윤창현 전 위원장의 입장문에 대하여”를 게시하는 것을 비롯해 언젠가부터 노사의 대립 구도가 첨예해졌다고 평가했다.
방문신 사장, 대립보다 협상에 귀 기울여 주길
채 조합원은 28년 몸담은 SBS를 <좋은 회사>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좋은 언론사>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SBS의 본질은 언론인데, <좋은 언론사>가 되기 위해선 노사가 신의성실 원칙을 복원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채 조합원은 방문신 SBS 사장이 노사협력팀 소속일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성품이 뛰어나고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채 조합원은 방 사장 등 사측에 “대립보다는 협력하는 데 귀를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조직의 계획이 아닌 몸이 움직이는 대로 살 것
이번 달 그린플랜에 들어가는 채 조합원은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국민’학교 입학 이후로 지금까지 조직의 계획에 따라 움직였는데,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특별하게 인생 계획을 세우면서 살고 싶진 않습니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생각이 나는 대로 그렇게 한번 살아보렵니다.” 채 조합원은 이 말을 하면서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울러 채수현 조합원의 퇴임행사는 9월24일 목동 사옥에서 진행됐습니다. 채 조합원의 안식년을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