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조합원 여러분. 오랜만에 노보로 인사드립니다. 초현실적인 비상계엄을 겪으며 후진적 정치에 크게 실망하셨을 겁니다. 여기에 시청자와 광고주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는 우리 뉴스를 보면서 또 한 번 절망하셨겠지요.
처음엔 작은 구멍이었습니다. 물이 새고 있으니 막아야 한다고 노동조합은 진즉에 조언했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잘 하고 있으니 걱정마라’였습니다. 구멍이 점점 커지고 물도 더 많이 새기에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고 수차례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성을 내며 들은 체도 안 했습니다. 그 결과는 ‘내란 사태’ 국면에서 경쟁사와 비교되는 참담한 성적표였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습니다. 희극으로 반복되길 바랐지만 비극이었습니다. 박근혜 탄핵 때 붕괴된 시청자들의 신뢰가 8년 만에 또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보도본부를 포함한 모든 SBS 구성원들이 이를 악물고 다시 끌어 올렸던 신뢰였기에 분노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최근 임명된 양윤석 보도본부장에 대해서도 여기저기서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 역시 박근혜 탄핵 사태가 터지기 직전 ‘물이 새니 막아야 한다’는 조언을 등한시했습니다. 보도국장인데도 풍문을 보도할 수 없다며 국정농단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더니, 태블릿PC 보도가 터지고 나서야 특별취재팀을 꾸렸습니다. 결국 취임 100여 일 만에 보도국장 직에서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이후 TY홀딩스 전무를 거쳐 SBS 정책실장에 임명되더니 이제는 보도본부장을 맡게 됐습니다. 지주회사 출신으로 대주주의 이해에 민감하게 기능한 양 본부장이 과연 지상파 보도의 독립성을 제대로 지켜나갈 수 있을지 구성원들은 반신반의합니다. 그는 “조직 구성원이 회사를 위해 하는 일을 대주주를 위한 일로 동일시 말아 달라”고 주장했지만, 노동조합은 여전히 그 말의 진정성이 의심스럽습니다. 태영건설 워크아웃 과정에서 “대주주가 남의 뼈만 깎고 있다”는 조롱을 받았고, SBS미디어그룹도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의사결정을 양 본부장은 대외에 자랑스럽게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윤석열 내란 사태에서 SBS는 시청자들로부터 철저히 버림 받았습니다. 정치권력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업보였습니다. 품격과 절제라는 말장난 뒤에 숨어 SBS의 보도 경쟁력을 완전히 망가뜨린 경영임원들과 직전 보도본부 수뇌부의 탓이 큽니다. 그 사이 SBS는 권력자들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뭉툭한 칼이 돼버렸고, 시청자들에게는 더는 머무를 필요가 없는 폐가가 돼 버렸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양 본부장이 “회사가 저에게 부여한 임무는 더 나은 보도본부의 미래를 만들라는 것이지, 대주주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뜻은 아니다”라고 명확히 밝힌 점입니다. 특히 “정확성과 객관성을 기준으로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예외 없이 보도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을 한 점을 평가하고 싶습니다.
노동조합은 양 본부장의 말만 믿고 제 할 일을 방기하지 않을 겁니다. 본부 단위로 위임한 편성위원회에서 공정성・독립성・자율성을 훼손했다고 판단이 되면 즉시 사장과 노조위원장을 대표로 하는 방송편성위원회를 수시로 소집하겠습니다. 필요한 경우 보도본부 편집회의에 조합 측 실무자를 참여시키겠습니다. 긴급발제권도 기자협회와 협의해 적극 행사하는 등 더 단단하고 촘촘한 감시와 견제를 해나갈 방침입니다.
이제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 보도, 폐허 위에서 다시 튼튼한 저널리즘을 세운다는 각오로 대주주가 아닌, 정치・경제 권력이 아닌, 오직 시청자만 보고 가야 합니다. 그게 SBS가 나아갈 방향이고 그게 SBS 구성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한겨울로 접어들었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연말연시 따뜻하게 보내시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2024.12.23.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조기호 본부장 드림
